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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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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The dark beauty holders.
글쓴이: 은령
작성일: 12-02-09 06:48 조회: 2,548 추천: 0 비추천: 0

0. 선도적 문화 수용자 겸 마법사 김대성의 일상.

큿소! 요즘 세상이란 말이지... 썩어도 너무 썩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천한 녀석들이 판치는 작금의 세상. 학교에서 배운 다원화사회라는 말이 생각난다. 21세기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포용하고 이해하는게 문화시민이 가져야할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다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들에게는 미천하다라는 형용사 조차 아깝다. 단순히 쓰레기라고 불러주겠다. 그래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나는 누구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데카르트의 철학적 질문이 바로 이런것이려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누구에 대해 생각하는가? 바로 학원에서 활개치고 있는 '일진회'라는 조직을 의미한다. 지네들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쓰레기들. 생각해보면 불쌍한 녀석들이다. 정상적인 녀석이라면 사춘기의 리비도를 학습이나 취미생활에 쓰기 마련이다. 일진녀석들은 리비도의 승화가 재대로 되지 않아 폭력적인 놈들이 되어버렸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놈들의 가정환경이 문제인 것이다. 보나마나 결손가정이거나 폭력적인 집에서 자랐겠지. 뭐랄까,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들이다. 나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분노해 외쳤다.

"라이트노벨 읽든 스마트폰에 일본음악을 넣어 듣던 말던 그건 네놈들이 신경쓸 일이 아니잖아? 한번만 내 취미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죽인다! 상대가 이라도 아니, 우주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소립자라 할지라도 철저히 분쇄해버린다! 내 파멸의 광기는 심지어 날 낳아주신 부모님 조차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정언명령이니까!"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애니음악에 머리를 흔들며 신작 라이트노벨 <조교실의 공주님>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책상에 드리워졌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애니에서 본 쿄이케의 시크한 표정을 상상하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뭡니까 당신은?"

놈은 썩은 표정을 짓더니 내 책을 휙 뺏어 아이들에게 알렸다.

"야 저 오타쿠 새끼. 또 이런책 본다. 조교실의 공주님? 이건 또 뭐야."

놈은 책을 휘리릭 펼쳐 일러스트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아아 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치아키상, 우에하라상, 쿄꼬상, 미미상의 아름다운 나신이 보인다. 순간 우쭐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고급 문화를 향유하는 1등 시민이라고, 너희들은 이 일러스트를 보고 열폭하겠지? 그런데 반 아이들, 특히 여자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뭐랄까, 날 혐오스럽게 쳐다보는것인가?! 감히 위대한 일본의 대일러스트레이터 다이타상의 작화도 몰라보는 미천한 녀석들 같으니.

"저기요, 그 책 돌려주는게 좋을텐데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을 취할테니까요."

난 일진들에게 최소한 경고라는 것을 해줬다. 하지만 경고를 알아들으면 그건 지적인 생명체지 하등 동물이 아니다. 하등동물인 일진 녀석들은 내 경고를 무시하고 심지어 스마트폰을 빼앗아 내 뮤직 재생목록을 읽어나갔다

"하늘색 천국. 마리사짱은 팬티를 숨겨버렸습니다. 쓰리 하트와 미에루상? 근데 너 방금 뭐라고 지껄였냐?"

"돌려달라고 말헀습니다만... 제 호크 아이가 당신의 심장을 멈춰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 멋있게 의자를 던져버렸다. 일진이 움찔하는게 보인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경고한다. 나는 너에게 명하노니, 당장 내 책과 스마트폰을 원래의 위치에 리포지셔닝할 것을 권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마법사협회의 인증을 받은 블랙 위자드 김대성의 권능으로 너의 심장을 멎게할테니까."

"푸하하 저새끼 뭐래? 해봐 새끼야."

일진은 파안대소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것 같다. 실룩이는 일진의 붉은 입술. 살짝 각질이 터있게 유난히 크게 보인다. 역겹다. 죽이고 싶다. 저런 각질을 가지고 있다는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학기 초부터살인을 저지르는건 난처하지만, 이건 다분히 경고의 차원인거다. 뭐랄까, 통달한 나의 역사적 지식에서 얻은 결론에 의하면 본보기로서 한 녀석을 손봐주는건 매우 효과적이다. 과거 독일제국이 그랬고 프랑스가 그랬으며 대영제국이 그랬으며 현재에는 미국이 그렇다.

그래서 난 손을 앞으로 뻗어 심장을 멈추는 주문을 외웠다.

"차원의 요정에게 명하노니, 눈 앞에 있는 짐승의 심장을 영원히 멈추게 할지어다..."

하지만 일진은 멍하니 서 있기만 할뿐이다.

뭐, 뭔가 잘못 되어버렸다!

"이새끼 미쳤구먼?!"

그날 난 두들겨 맞았다. 아니 맞아주었을뿐이다. 어쩌면 내 가슴속에는 살인은 절대 안된다라는 이성이 남아있어서 마법이 발휘되지 않게 한것인지도 모른다. 이니 모른다라는 추측이 아니라 그렇다라는 확신으로 정정한다. 나는 컴퓨터를 키고 즐겨가는 취미 사이트에 접속해 일진들의 비인간성을 성토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절대 약해서 맞은게 아니라, 단지 살인을 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본능 때문에 힘이 발휘되지 않는 것이라 주장했다. 나는 온라인속의 사람들이 내 고도로 정제된 사고를 이해하지 못할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도 녀석들은 피식 비웃을뿐이었다.

"하찮은 존재들은 역시 날 이해하지 못해."

그렇지만 2명의 용자는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었다.

미미짱 : 다. 당신도 그렇습니까? 실은 저도 요즘 그렇다죠.

카츠라 : 저도 직사의 마안을 사용할뻔했습니다만 참았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우리들의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처럼 의기투합해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일진들의 간섭은 계속된다. 짜증났지만 수련한다 치고 넘어갔다. 약간 스트레스가 생길때마다 사이트에 접속해 미미짱, 카츠라님과 대화를 계속하다보니 사고의 지평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신감이 생겨 우리 서브컬쳐 문화를 오타쿠라 비하하는 이른바 디시인사이드에 가서 글을 하나 올려주었다.

글쓴이 : 겐사츠군

내용 : 요즘 막장들이 많군요. 흔히 애니 보는 사람들을 오덕이니 뭐니 까는데 그럼 수학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학 덕후고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은 스포츠 덕후겠네요? 다른사람의 취미를 존중하지 않는건 인간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다른사람들에게 피해를 줬습니까? 그리고 오덕후 까면 다 오덕후입니다. 상대를 깔라면 그 분야에 알아야 되는데 그걸 아는 순간 다 오덕후가 되는겁니다. 어때요? 여기서 이상한 글 싸지르는 분들 한번 반박해보시죠?^^

불꽃 같은 욕설글이 달린다. 그렇지만 단언컨데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은 하나도 없다. 역시 내가 옳았던 거다! 나는 자신감 있게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따윈 의식할 필요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된다. 그게 우주속에 위치한 나의 사명이다. 공수래공수간이라는 명문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우주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간다. 이 하잘것없이 짧은 인생에서 남의 눈치나 보고 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물론 공수래공수간은 재대로 쓴게 맞을거다.

갈수록 폭력은 심해진다. 주먹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 여자 애들의 비웃음소리가 귀에 들린다. 마법을 쓰면 단박에 해결되는 일이지만 인간세계에 개입하지 말라는 마법사협회의 권고안에 따를 수 밖에 없어 짜증이 났다.

"큿소! 마법사 협회는 너무 깐깐해서 탈이란 말이야."

나는 힘들때마다 인터넷에서 미미짱과 카츠라님을 만났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오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었다. 실은 미미짱과 카츠라님도 나랑 같은 학교의 동급생인것이다! 역시 세상은 좁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다원화 시대를 역행하는 버러지 일진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건 나는 세계 마법사 협회의 인증을 받은 위자드라면, 미미짱은 무림의 고수고, 카츠라상은 군사지식에 통달한 밀리터리 매니아인것이다.

미미짱 : 저의 질풍각 한방이면 녀석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겠죠.

카츠라상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얻은 MK40권총의 총알이 요즘 남아돌아서 고민이랄까요.

우리는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고, 방과 후 옥상에서 모였다. 잘생겼다는 미미짱은 멸치의 몸매였고, 카츠라상은 나보다 더 뚱뚱헀다. 우리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내가 먼저 타파하기로 했다.

"뭐랄까, 인터넷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군요. 당신이 한국의 미미짱과 카츠라상인겝니까?!"

"네, 실은 본 모습을 인간에게 보일 수 없어서 가면을 쓰고 왔다죠."

"저도 그렇습니다."

"크윽, 아무튼 좋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진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줘야 합니다."

"앗! 저기 혼자 걸어가는 일진이 보입니다."

"크큭, 기회가 왔군요. 손좀 봐주도록 할까요?"

우리는 야구부의 부실을 뒤져 방망이를 들고 일진에게 달려갔다. 나는 먼저 일진을 때릴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무공 고수 미미짱과 사격술의 귀재 카츠라상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 내가 무서워서 그런건 아니다. 하지만,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두분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음, 저것은 공포에 지린것이 아니라, 진폭을 이용한 것이다. 뉴튼인지 아이작인지 몰라도 진폭의 움직임을 이용한다면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논문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 미미짱과 카츠라님은 극강의 일격을 위해 준비중인 것이다.

"뭐야 이 오덕 새끼들아. 야구방망이 들고 왜 지랄이야? 할 말 없으면 그냥 꺼져라."

일진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말한다. 저런 건방진! 조금만 있으면 땅과 키스할 녀석이 말이다.

"카, 카츠라님 먼저 가시죠."

"아니요, 미미님이 선봉에 서시는 영광을..."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선봉을 미루고 있었다. 결론이 나지 않자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는 오늘은 마법을 쓰지 못한달까요."

우리는 그렇게 사이좋게 얻어맞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실은 .... 아니다.

"아, 현실에서도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마음껏 귀여워 해줄텐데!"

나는 침대에 누워 망상, 아니 있음직한 현실을 꿈꾸었다.

< 위 이야기는 당시 중2이던 김대성군의 일기와 생각을 들여다보아 재구성한 것이다. 조사관으로서 소견을 말하자면 김대성은 수년 내로 정신분열증 및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다만, 취약한 현실인식능력으로 인해 우리가 찾던 인물임에는 명백하다. 현 추세를 미루어볼때 그가 고1이 되는 시점이 가장 적절한 듯 하다. 마계 원로원 소속 조사관, 유스코티니아 씀>

1. 동인녀, 미인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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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수학여행, 게임, 쇼핑, 연애편지, 남자친구, 발렌타인 데이 등. 하지만 내 중학교 3년의 기억은 잿빛에 잠겨있다. 친구나 우정이라나 단어는 나와는 관계 없는 말이다. 등하굣길은 언제나 혼자였고, 친구와 같이 점심을 먹은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먼 미래에 할머니가 되어 손자를 무릎위에 얹혀놓고 흐뭇하게 웃고있는 내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귀여운 손자가 눈을 반짝 빛내며 ‘할머니는 학창시절에 뭐했어?’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할머니는 못생겨서 언제나 소극적이었단다.’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대충 둘러대야 할까?

나는 평범하지 않은 16세 중학생 소녀. 이제 몇 달만 있으면 17살의 예비 고등학생이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동인녀이기 때문이다. 먼저 단어에 대한 정의를 하자면, 원래는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동호인이라고 불렀고 동인녀는 동호인과 여자의 합성어이다. 그렇지만 어느순간부터 동인녀의 의미가 변질되더니 지금은 BL물을 종아하는 여자들을 칭하게 되버렸다. BL물이란 Boys Love의 약자로서 남자들의 동성애를 뜻한다. 즉, 동인녀는 동성애를 좋아하는 여자를 지칭한다.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떳떳하지 않다는 걸 안다. 동인녀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할때면 남들에게 당당하자고 말하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거다. ‘우리는 하고 싶은걸 하기 때문에 당당해.’라고 말하면서도 결정적일 때 취미를 밝히지 못하고 깊은 굴 안으로 숨어들어가버리곤 했으니까. 우리가 잘생긴 남학생이나 좋아하는 선배 앞에서 동인녀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먼 꿈나라의 일이다.

내가 왜 동인녀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스갯소리로 태어날때부터 취행향이 정해져있다는 유전설이나,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환경론이 있다.

글쎄, 이제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건 내가 동인녀라는 사실이다.

대여점에서 빌려온 동성애 취향의 만화책을 보던 탐닉하던 나는 갑작스럽게 자괴감이 들었다.

‘나같은 여자애. 좋아해줄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검은 뿔테안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드름 흉터와, 떡이된 단발머리, 소녀인데도 뱃살이 한움큼 잡히는 저주 받은 몸매. 여자라고 생각하기 힘든 외모다. 이 비침한 현실을 잊기 위해 잘생긴 남자들의 야한 행위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평범한 소녀처럼 고백받고 싶고, 동성애물을 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최소한 평범하게는 생겨야 하잖아? 남자는 돈, 여자는 외모라는 말도 있듯이 한국은 나같은 추녀에게 너무 불리하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못생기게 낳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신다. 그리고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남자들의 본심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몸매랑 얼굴이 못생긴 여자는 인간 취급도 해주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얼굴보다 마음이지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지만 막상 나같은 여자가 고백해오면 싫어할건 뻔하다.

어느날 교실에 남은 남녀의 이야기를 엿들은적이 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한 남자애가 잘나가는 여자애에게 “너네 여자애들은 왜 선교랑 같이 안 놀아?”라고 묻자 여자애는 “못생겼잖아. 같이 다니면 존나 쪽팔려.”라 말했다.

그날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하염없이 울었다. 좋아하는 선배가 있어도 창문 너머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현실. 같은 여자인데도 외모 때문에 배척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싫다. 내게 인생의 봄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동인 게임과 만화책을 보자. 술에 취한것처럼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2. 실버 뷰티 홀더스

나는 한 남자 앞에 서 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창백한 안색을 가진 무표정한 남자. 속을 전혀 알 수 없어 두렵지만, 그마저도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다. 동인녀의 본능이 깨어난다. 이 와중에 이 남자가 공인지 수인지, 어울리는 남자 연애인이 누구인지 생각하고야 말았다.

“너 말이야. 정선교지?”

“...그런데요?”

남자의 목소리는 청량했다.

“네가 밤마다 외치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수가 없어서 말이야. 예뻐지고 싶다는 염원이 마계를 넘어 내 침대까지 도달하니까. 대표로 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왔어.”

나는 얼굴이 붉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대 속에서 하던 망상이 마계까지 들어갔다고? 마족이 실제로 있었다니! 아니 이 남자, 마족이 맞기는 한거야?

“저, 정말 마족이세요? 제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거에요?”

내 반문을 남자는 가볍게 무시하고 독백을 시작했다.

“아 정말 한심할 정도로 못생긴 아이로구나, 간절히 기도할만해. 내 이름은 루크. 마계의 23대 집정관이란다. 귀찮은 너의 염원을 잠재우기 위해 소원을 들어줘야겠군. 아 놀란 표정은 짓지마. 너같은 인간이 한둘이 아니거든. 방금도 한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고 왔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넌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고, 나는 그걸 들어줄 능력이 있어. 그렇다면 너는 대가로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해줄수 있는게 없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대게 영혼을 바치던데, 그러면 죽어서 마족의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이미 눈 앞의 남자를 마족이라고 확신한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내 생각을 읽은 듯,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영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거지? 인간들은 뭐든지 제 멋대로 상상해버린다니까. 단지 게임에 참가하면 된단다.”

“게임이요?”

“방금 전 한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말했을거야. 녀석의 이름은 김대성, 나이는 너랑 동갑인 16세. 세상사람들이 오타쿠라 부르는 녀석이지. 너처럼 밤마다 어떤 소원을 염원하는 소리가 시끄러 이 몸이 친히 소원을 들어주었어.”

루크는 쿡쿡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딱히 맞추고 싶은 욕구는 없었지만, 마족 눈치를 봐서 나쁠 필요는 없었기에, 매혹적인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잘생겨지게 해달라거나. 그런게 아니에요?”

“틀렸어. 현실에서 ‘미연시’를 하고 싶다더구나.”

미연시는 ‘미소녀연예시뮬레이션의’ 준말. 주인공이 각종 여자 캐릭터와 엮이며 대리만족을 주는 게임을 말한다. 비록 직접 플레이한적은 없지만 동인녀인 내게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하지만 마족의 입에서 미연시라는 단어가 나와 당혹스러웠다.

“미연시라면, 게임이잖아요?”

“그래, 나도 처음에 뭔가 궁금해 물어봤으니까. 미연시의 핵심은 한마디로 하렘이다. 남자가 여자를 거느리며 현실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구성이지. 대성이라는 친구는 그걸 하고 싶단는거야. 나는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지. 여기서 문제가 생겨. 주인공은 대성이 맡으면 되지만, 게임의 말에 되어줄 여자는 어디서 구할까? 서큐버스들을 학생으로 위장시켜도 되겠지만 그런 기계적이고 활발하지 않은 게임은 좋아하지 않거든. 직접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 여성이 직접 참여하길 원해.”

“설마?!”

“그래, 네가 바로 그 말이 되줘야겠다.”

“말도 안돼요..”

“미인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졸업식날, 대성의 선택을 받는다면 영원히 아름답게 살아가게 될거야. 하지만 선택받는자는 단 한명.”

단 한명이라고? 그렇다면 게임에 참여하는 여자는 다수라는 이야기인데.

“저 말고도 게임에 참여하는 여자가 있어요? 아, 그러니까 만약 제가 참여한다면요.”

“플레이어가 한명뿐이라면 게임은 재미없는 법이니까. 너 말고도 미를 갈구하는 소녀들이 많아. 그녀들도 게임에 참여할거야. 물론 네가 첫 번째로 참여할것같지만 말이야. 자 어때? 참가하겠니? 만약 거절한다면 날 만난 기억을 모두 삭제하고 조용히 사라져줄게.”

이보다 유리한 조건은 없었다. 영혼따위 바치지 않아도 되고 선택을 받지 못하면 아쉽더라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게다가 게임에 참여하는것만으로도 미인이 될 기회를 얻는거니, 돈 잃을 걱정없이 슬롯머신의 레버를 마음껏 당기는 셈이다. 하지만 속을 너무 보여주면 그러니까 잠시 숙고하는척 하자. 난 5분정도 고심하는척 한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조건을 거는거에요. 그냥 소원을 들어주면 되잖아요.”

"세상에 공짜란 없어. 내 즐거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데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있겠니?

"좋아요. 할게요."

"먼저 한가지 동의해. 게임에 대해 발설하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다,"

섬뜩한 조건이 마음을 흔들었지만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되니까. 오히려 다른사람이 이 비밀을 알게되는게 싫었다.

“동의할게요.”

“계약성립, 자 그럼 먼저 선물을 드리지요.”

마족은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뜻은 알수 없지만 매우 음산한 단어임에는 확실했다. 방이 뜨거워지고,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창문이 덜컥 열렸다. 루크의 휘날리는 망토 사이로 그의 팔이 간간히 보였다. 잠시 후, 내 몸에서 빛이 나더니 모든게 일순간 잠잠해졌다.

“되었다. 새로운 몸을 축하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난 거울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울에 갇힌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외모를 가질 수 있지? 어떤 묘사를 하더라도 내 미모를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듣는 사람이 멋대로 상상해버릴테니까. 복숭아처럼 뽀송뽀송한 피부와, 은색 실크를 세단기로 잘라낸 듯 흩날리는 긴 생머리. 살짝 올라가 섹시한 느낌을 주는 눈꼬리와 수려하게 옆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눈썹은 살짝 반달처럼 굽어 아름다웠다. 입술은 붉고 도톰했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야말로 이상적이었다. 비너스나 아프로디테가 재림한다면 아마 이런모습이 아닐까.

“이게 나?”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마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채 피식 웃고만 있었다. 돌이켜보면 폭주하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건내도 소용이 없으리라는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분이나 미친여자애처럼 뛰어다녔을까? 루크가 입을 열었다.

“어때 만족하니?”

“완벽해요! 정말 상상이상이에요. 연예인 보다 훨씬 예뻐요. 아 그리고 눈도 좋아진거 같아요. 안경이 없어도 되게 잘 보이네요. 키도 좀 커진거 같고, 와우 몸매도 완벽한데, 가슴 좀 봐. 최소한 B컵은 되겠어!”

“상상했던 몸이 된거야.”

“맞아요, 이건 상상했던 몸이에요.”

“네가 평소 원하던 이미지가 조합된 것. 몸을 유지하려면 열심히 하는게 좋을걸.”

“뭐든지 할거에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난 열의에 불타올랐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네가 게임의 캐릭터가 되어야 하는건 알고있지? 미연시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캐릭터가 존재해. 그 중의 하나를 골라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거야. 다른 참가자들과의 형평성을 위해 제비를 뽑도록 하자.”

루크는 손을 몇 번 흔들더니, 어둠의 공간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신기한 모습에 넋놓고 바라보자 루크는 검지와 중지를 부딫혀 딱 소리를 내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손을 넣어 하나를 뽑아. 행운을 빌어.”

미연시에 어떤 캐릭터가 나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선택미래를 결정지으리란걸 느꼈다. 여자의 본능은 생각보다 정확하니까.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자 보인건 [폭력 츤데레]라는 글자가 써있다. 일본어인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뜻은 알 수 없다.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봐 설명을 요구했다.

“꽤 좋은 캐릭터이네. 출발의 여신이 네게 미소를 지었어. 츤데레는 일본말이야, 츤과 데레의 합성어랄까. 겉으로는 싫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츤데레라고 하지. 한국어로는 내숭쟁이, 아니 새침떼기가 좋으려나? 자세한건 이 게임소프트웨어를 플레이해보면 알 수 있을거야.”

루크는 내게 반나체의 여자가 그려진 패키지들을 주었다. 대충 봐도 역겨웠다. 남자들은 다 이런걸 할까? 내가 동인녀라지만 남자 오타쿠들은 싫었다.

“열심히 연구해. 게임 규칙 중 하나는 남의 캐릭터 특성을 이용할 수 없다는거야. 철저히 연구하지 않으면 곤란해져.”

루크는 말을 마치고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자, 잠시만요!”

찰나의 시간이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꿈인가 생각했지만 너무나 생생했고, 거울속에 비친 미녀는 현실감을 일깨워졌다. 엄마가 이 모습을 보면 놀라겠지? 다행히도 해외 지사에 파견을 나가서 한동안 걸릴일은 없다. 난 게임소프트웨어를 앞에두고 변한 몸을 이용해 평소 사놓기만 하고 입지 못했던 원피스를 입어보았다. 나는 기뻐서 바보처럼 울었다.

***

요 며칠간, 변해버린 미모에 관심을 주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사진 공포증이 있었지만 셀카도 원없이 찍어보고 인터넷에 쇼핑몰에서 옷을 주문해 집안에서 소박한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택배 아저씨가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랬을까? 아직도 나는 내 미모를 믿을 수 없다. 거울 속에 비친 나, 신기루가 아닐까?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신기루는 언젠간 사라지고 마니까. 그래 내 외모는 영원한 다이아몬드야. 그러기 위해선 몸을 지켜야 해. 이럴때가 아니다. 어서 츤데래 캐릭터에 대해 연구를 해야지. 루크가 주고간 게임 소프트웨어가 생각났다.

[주인님과 음탕한 나]

[파르페 포니테일!]

[엔딩 이전의 고양이귀를 향한 일편단심]

[푸릿푸릿! 메이드 찻집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제목만 봐도 현기증이 난다. 컴퓨터를 켜고 하나씩 플레이해보기로 했다. 화면에 주인공이 나온다. 눈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코가 없다시피하며, 이빨이 없는 가상 소녀들을 만난다. 적당히 호감도를 올리다 이른바 H씬이라는 야한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히로인들 중 한명과 엔딩. 간드러지는 성우들의 목소리는 그렇다쳐도 이 게임을 하면서 든 생각은, 이 게임에 나오는 여자애들은 바보가 확실했다. 도무지 생각이란게 없어보인다. 게임을 플레이 해본결과 대부분 이런 미연시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평균 이하의 남자들이다. 가끔가다 뛰어난 아이도 등장하지만 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평범한 인간들이다. 반면 히로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배경이 좋고, 성적도 우수한 경우가 많다. 그런 히로인들이 뭐가 아쉬워서 주인공에게 매달리거나 옷을 벗으면서 육탄공세를 펼칠까.

현실의 여자들이 얼마나 냉혹하고 타산적인데. 외모, 센스, 키, 성적, 돈, 은근히 다 밝힌다. 내가 봐온 여자애들도 틈만 나면 남자애들의 조건을 따진다. 미연시의 히로인은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처럼 쥐뿔도 없는 남주인공에게 모든걸 바친다. 현실속의 여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아름답고 인기있는 여자애는 평범하고 소극적인 남자애들과 말한번 안 섞고 졸업하게 될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게 다 의도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좌절한 남자들의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주기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만 사랑해주는 미소녀의 존재는 큰 위안을 주는게 아닐까?

물론 동인녀로서 나도 연예인과 다소 뜨거운 상상을 하곤 하지만, 이렇게 망상이 구체화된 미연시라는 존재는 뭔가 아니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억누르며 게임을 계속했다. [방과 후의 노팬티 사립탐정]을 클리어 한 후 [어둠의 체육관]을 플레이했다. 야한 장면이 휘리릭 나오지만 내성이 생겨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츤데레 캐릭터가 나온다. 붉은 포니테일의 미소녀는 팔짱을 낀채로 대사를 뱉어냈다.

[오오하라 유키 : 따, 딱히 네가 마음에 들어서 도시락을 같이 먹는게 아니야. 착각하지말라구! 가, 갑자기 어딜 보는거야? 가슴 쳐다본거지? 꺄앗, 겐지군 열 번 죽어버려!]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주인공이 얻어맞는 소리가 들린다. 후우, 또 나와버렸다. 츤데레 + 폭력녀 설정. 주인공은 시종일관 게임에서 얻어맞는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시덥지 않은 명분으로 만들어서 츤데레녀는 주인공을 때린다.

나는 메모지에 츤데레 캐릭터의 특성을 옮겨적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게임에서 츤데레 히로인은 남주인공을 때리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 장수하고 있는 캐릭터 설정이라고 하니 흡수해서 나쁠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내가 츤데레를 뽑은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츤데레 말고 얀데레나 도짓코, 텐네보케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캐릭터들은 연기하기에 아주 힘들어보였으니까. 이제 충분히 츤데레 캐릭터를 알았으니 실제로 연기하기로 했다. 거울 앞에 서서 나름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본대로 팔짱을 끼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흐, 흥! 딱히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건 아니니까.”

거울 속의 소녀는 내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의외로 쉬운걸? 세상에 있는 어떤 남자라도 지금 내 외모라면 전부 넘어오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거의 모든 미소녀 게임에서 1,2순위 인기를 얻는 츤데레 캐릭터를 무기로 가지고 있으니, 김대성이라는 남자애도 오타쿠니 츤데레를 좋아할테고, 이제 고백을 받는건 시간문제였다. 영원히 이 몸으로 살생각을 하니 행복해졌고 망상으로 가득찬 침대 안에서 나는 하루를 마무리 했다.

***

일주일이 흘렀고, 루크는 그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게 한여름밤의 꿈, 아니 한겨울밤의 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내 얼굴은 모든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밖에 한발자국도 나간적이 없다. 나가고 싶지만 길한복판에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나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시선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언젠까지나 집안에만 있을 수 는 없었다. 나가야했다.

용기를 내 현관문을 나서 슈퍼로 향했다. 주인 아줌마가 자꾸 쳐다보는데 두려우면서도 뿌듯했다.

“어머 학생, 정말 예쁘네.”

“어, 그, 그래요? 감사합니다.”

“연예인해도 되곘어. 태어나서 학생만큼 예쁜 사람은 처음이야.”

“아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지폐를 던지다 시피 하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린다. 들키지 않았다! 내가 못생긴 동인녀 정선교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날 난 왠지모를 고양감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탁자에 편지가 놓여 있는게 보였다.

황급히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었다.

[새로운 운명을 거머쥔 숙녀 여러분. 다들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거라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이자 공정한 게임의 심판인 루크입니다.

게임이 시작되기 앞서, 자세한 규칙을 여러분께 설명해드리기 위해 플레이어 전원이 토요일 저녁 6시, 서울 콘티넨탈 호텔의 리셉션장에 참석하길 희망합니다. 약속이 있으시더라도 취소하시고 반드시 참여하십시오. 불참시 불이익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유려한 필체로 쓰인 경고메시지는 섬뜩했다. 불이익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니. 한편, 마족이 호텔을 잡는다는 자체가 웃기기도 했다. 토요일이 되자 나는 택시를 타고 콘티넨탈 호텔로 향했다. 옷차림은 최대한 평범하게, 즐겨입던 청바지와 곤색 남방. 택시기사의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 들어가 안내판에 적힌대로 8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으려는데 정작을 입은 중년남성이 내 팔을 붙잡았다.

“서울 콘티넨탈 호텔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게임에 참여하시는 분입니까?”

“아, 네.”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이쪽으로.”

그는 한 탈의실로 나를 인도했다. 여러 가지 화려한 의상이 옷걸이에 있었다. 중세 가면무도회에 쓰이는 그로테스크하고 화렬한 나비가면과 드레스들. 영화에서만 볼법한것들이라 신기했다.

“옷을 갈아입으시고 가면을 착용하십시오. 절대 맨 얼굴을 남에게 보여선 안됩니다.”

“에, 가면이요? 저, 잠시만요! 저 이런거 입을지 모르는데요!”

중년남자는 무심히 날 남겨두고 떠났다. 어쩔 수 없이 드레스로 갈아입고 가면을 썼다. 먼 옛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살았던 백작 부인이 나처럼 생겼을까? 거울에 비친 여자는 가슴골이 파인 블랙 드레스와 파란 나비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름아닌 나였다. 눈 주위는 가려졌지만 가면 속에 빼어난 미의 여신이 웅크려있다는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정도로 광채가 났다. 구두도 놓여있었지만 굽이 너무 높아 그냥 운동화를 신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니 발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는 아까 봤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우시군요.”

그는 탄성을 내뱉고는 나를 리셉션장으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면속에 감춰진 수십쌍의 눈일 날 바라보았다. 숨이 막힐 것 같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당당한척 걸어갔다. 아니, 당당한건 내 착각일뿐이고 남이 보기엔 허리가 굽은 노파가 걷는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나는 원탁에 빈자리에 섰다. 먼저 와 있는 여자들의 실루엣과 피부상태 그리고 머릿결로 보아 만만찮은 미인이 분명했다.

생각해보니 루크가 소원을 들어준 여자들도 미에 대한 갈망이 대단했을텐데 어째서 나 혼자만 미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보다 아름다운 여자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싸늘해졌다.

****

루크가 어둠속에서 등장하자 소녀들은 흠칫 놀라거나 경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국 신사처럼 꼬리가 긴 프록코트와 광이나는 검정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루크는 단상에 섰다.

“500년전 유희를 즐길 때 이탈리아에 간적이 있지. 마치 그때로 돌아가 귀족가의 영애들을 마주보는 듯 하는군. 가면을 쓰라고 한건 서로의 신분을 신분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야. 개인적으로 작전을 세우는 경우는 팀이 생기면 불공정해져버리니까. 목표는 모두 알고 있듯이 1년후 김대성으로부터 고백을 받으면 몸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저기...질문이 있습니다.”

내 왼편에 서 있는 소녀가 울먹이며 손을 들었다.

“뭐지?

“저, 저는 초등학생 몸로 변해버렸어요. 하지만 캐릭터는 흐흑.”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늘높이 펴보였다. 나를 포함한 소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섹시 + 누님]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몸으로는 누님 캐릭터를 연기할 수 없어요! 미연시를 수백번 플레이해봤지만 이런 체구로 누님역할을 한 캐릭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제발, 다른 캐릭터로 바꿔주세요. 여기 저랑 캐릭터 교환하실분 없으신가요? 제발 부탁드려요!”

가면속의 소녀의 눈빛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유감스럽게도 교환은 불가능합니다. 제비뽑기의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루크가 선언에 몇몇 소녀들이 키득거렸다.

“경쟁자가 한명 줄었네.”

“불쌍하지만 뭐 내가 살고 볼일이지.”

나는 그녀들처럼 기뻐하지 못했다. 언젠가 탈락하는 사람 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내 불행을 축복하겠지. 내 오른쪽에 서있는 적안의 소녀는 기분이 좋은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섹시한 누님]캐릭터가 걸린 이름 모를 로리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고, 나는 마음이 불편해 의도적으로 그녀를 무시했다. 간헐적인 울음소리를 배경삼아 루크의 설명이 이어졌다.

“두번째 규칙은 게임기간내에 순결을 유지할 것. 여러분들은 미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월한 육체로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날 포함한 소녀들은 모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번째 규칙은 위신(prestige)시스템. 아주 중요하니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여러분들은 학업과 교우관계를 무시하고 김대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펼칠것입니다. 승리가 중요하지 공부나 우정따윈 필요없으니까요. 하루종일 주위를 맴돌며 호감을 얻으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건 미연시가 아닙니다. 게임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높은 사회적인 지위와 재능 인맥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들 이런것들을 소유해야 남주인공은 게임의 현실성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신 시스템은 쉽게 말해 평판을 수치화한것입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여러분들의 위신 점수는 전부 0에서 시작됩니다. 1000점에서 마이너스 100점사이에서 변화되며, 거래가 가능해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김대성에게 접근해 이벤트를 시도한다면 일정한 위신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걸 이해하는 소녀들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내 기대를 짓밟는 목소리가 있었다.

“질문입니다. 위신을 사회적인 평판이라고 하셨는데 평판이란건 개인적인게 아닙니까?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누구는 긍정적으로 볼수도 있지만 누군 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수치로 나타내는게 가능할까요?”

가면을 쓴 푸른 머리의 소녀가 손을 들자 탄성이 터졌다. 짧은 시간내에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두뇌도 놀랍지만 루크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자세가 더 놀라웠다.

“그야 평균으로 내겠지.”

맞은편 금발 소녀가 팔짱을 낀채 말했다.

“말이 상당히 거치네. 이름이 뭐지?”

“그전에 너부터 밝히는게 예의 아니야?”

“나는...”

“워워, 모두 진정하십시오.”

루크가 다급히 나섰다.

“게임전에 사적인 이야기는 금지입니다. 설명에 대해 답을 해드리지요. 말씀대로 위신은 사람들 마음의 평균을 내서 구하게 됩니다. 흑발의 숙녀분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수치화하는가 궁금하셨을겁니다. 맞지요?”

“네, 그렇습니다.”

“심장박동과 두뇌의 혈류량 변화, 그리고 동공의 크기, 목소리의 변화등을 감지한다면 어떤 사람을 보았을때의 호감도를 알 수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하죠?”

“지금 보여드리죠. 모두 들어오도록!”

루크가 밖으로 손짓을 하자 섹시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검은 상자를 가져왔다. 말로만 듣던 서큐버스인가? 상자가 소녀들에게 전달되자 루크는 풀어보라고 말했다. 안에는 날렵한 디자인의 ‘스마트폰’이 들어있었다.

“이거, 최신형이잖아!”

“한대당 2백만원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K전자의 최신 스마트폰 ‘아테네 세븐’. 출시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해외 유명디자이너와 합작했다는 명성 때문에 나같은 서민은 엄두 내지도 못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시중의 제품과 같지만 성능은 수천배 뛰어납니다. 내부에 첨단 소프트웨어가 설치되있어 사람들의 신체반응을 측정할 수 있지요.”

내 상상속에서 마족이란 화염계 마법을 쓰고, 중세풍의 괴기스러운 성에 살며, 지옥의 불길속에서 마물들을 때려잡고, 흑날개를 이용해 날아다니는 존재였다. 소프트웨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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