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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청년 명랑 소설 -독서회-
글쓴이: Dubidu
작성일: 12-02-06 16:14 조회: 2,991 추천: 0 비추천: 0

Prologue 어느 운수 좋은 날의 종말



시혁의 표정은 예술적이었다.

입이 절망의 무게에 짓눌리고, 짓눌려 다물어질 줄 몰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확장된 동공은 두려워하면서도 파국에서 눈을 때지 못했고. 그 몰골은 뭉크의 절규를 압도했다. 그렇게 향년 17세의 남학생 정시혁은, 표정으로써 세상의 종말을, 이 모든 카타스트로피를 얼굴에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마른 북어처럼.

그와 같이 바싹 마른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손안의 성적표를 보았다. 눈이 종이의 글씨를 읽을 때마다, 그의 얼굴은 더 말라갔다.

[총합 백분위 90%]

원래는 20%다.

[수학 원 점수 89]

그는 수학 포기자다.

거기에 평소보다 다른 과목의 점수가 10점 이상 더 높다. 시험 칠 때 이건가, 저건가 싶은 것이 죄다 맞았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운.

“얌마, 성적표 보다 체했냐? 표정이 영 별로다?”

“…….”

“어라 성적 잘 받았네? 웬일이냐?”

그 친구의 말에, 시현은 답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옥죄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그가 죽던지, 다른 사람이 죽던지.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오늘의 운은 최고였다.

어젯밤, 그는 라스트 보스를 잡아야 했다. 안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모든 긍지가 그 라스트 보스에 걸려있었다. 그렇기에 밤을 꼬박 불태웠고, 결국 지각을 했다. 물론 각오는 했었다. 주임 선생의 각진 고급 각목에 그의 손과 발을 불태울 것이라는 정도는. 허나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고, 그는 공포 속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이어갔다. 그러나 선생님도 지각을 했다.

그까지라면 괜찮았다. 있을 법하니까. 사람이 한 번은 운이 좋을 수 있지 않은가.

허나, 오늘 아침에 바꾼 자리가 놀기 최고로 좋은 최고 뒷줄, 그것도 창가 자리라는 것은 약간 지나쳤다. 그 앞에 덩치 큰 녀석이 있어서 뭘 해도 가려진다는 것은 너무 좋았다.

거기까지도 일반적인 행운이라고 칠 수 있었다. 그의 인생 대다수는 불운으로 채워져 있었고, 저런 대박 한 번 터진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상품에 당첨 되셨습니다!]

라던가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

라고,

응모하지도 않은 것들이 자동 당첨 된다면. 그리고 그게 문자 칸을 한가득 채운다면.

이건 상식 이상이지 않은가?

“이건 문제야. 문제.”

그는 계속 다리를 떨었다.

죽을 만큼 심각한 문제다. 그렇게 불안감 속에서 4교시가 지나갔고. 급식 시간에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너무 불안했기에, 배조차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급식 시간은 그렇게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지나치게 무의미하고 불운했기에, 시혁은 오히려 안심했다. 이만하면 행운은 끝난 것이라고.

“근데, 배고파.”

아침도 들어가지 않은 위장이 비명을 질러대었기에, 그는 급식실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묘하게 많이 남은 음식들과 마주했다. 분명 오늘 급식은 핫도그였고, 급식 아주머니들은 그걸 아껴서 분배했으며, 결국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몰려오는 공복감에 패배, 남은 핫도그를 마구 먹어치웠다.

핫도그를 입안에 밀어 넣으며, 그는 다시 불안에 떨었다.

이만하면 세계 멸망 급이란 말이다.

친구가 물었었다.

“오늘 운 죽이게 좋네. 좋겠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모든 게 아침의 일 때문이었다.

어느 날과 비슷한 조건이었지만, 그 날은 다른 날과 달랐다. 등을 타고 오르는 질퍽한 기분이 그를 먹어치우려 했었다. 그건 불행이라는 놈이었다. 천천히, 그를 잠식하는 괴물에 시현은 몸을 떨었다.

언제나 이랬다.

이런 괴물이 오르는 날에는 운이 억세게 좋았다.

3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날 당첨된 상품은 4개였다. 그 중에서는 5박 6일 하와이 여행권도 있었던 것 같았다. 난폭했던 선생님은 그날 갑자기 방문한 장학사 때문에 온순해졌고, 숙제를 안 해온 그는 맞지 않았다. 급식은 웬일로 맛있었고, 담임은 웬일로 빨리 종례를 했다. 그날 게임에서는 집행검이라는, 일반적인 운으로 구할 수 없는 게임 아이템이 나왔으며. 원장의 개인 사정으로 학원이 쉬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는 저녁이 나왔다. 요컨대, 일반적인 중학생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날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그날이 끝나기 직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웬 자동차가 질주해 와서 그를 치고 달아난 것이다. 다리 한쪽이 부러지고, 갈비뼈 네 대가 나갔다.

몇 번이나 수술했고. 몇 개월이나 병원에 있었다.

1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은 학교에서 하루 종일 운이 좋았고, 상품 13개에 당첨 되었으며. 그 중 하나가 그랜드 피아노였던 날이 있다. 또한 그는 최강의 길드로 최고의 공성전을 했으며, 그 결과로 아버지 1년 연봉보다 비싼 성 한 채의 주인이 되었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놀러 왔었던 사촌 누나가 죽었다.

지나가던 살인마에게, 강간당한 후 죽었다.

최악의 운이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잖아.”

그때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었지만. 울어버렸다.

마음속에서는 “네 책임이야.”라는 말이 그의 목을 졸랐으니까.

그렇기에 눈앞의 상황에서, 시현은 불안했다.

지나치게 좋은 운. 25개의 상품 당첨. 최대는 SUV 자동차 한 대.

이제 무슨 일이 생길까? 그의 사지가 터져나갈까? 강간마가 청년막을 뚫고 그의 목을 조를까? 아니면 부모님이 돌아가실까? 자동차 사고로? 비행기 추락? 운석? 번개?

아니면, 지금 눈앞의 소녀가 죽을까?

소녀가 있었다,

그것도 예쁜 소녀였다. 짧게 자른 단발에, 밝은 인상. 적당히 올록볼록한 몸매. 어디를 가나 눈에 띌 외모였다.

이름은 윤나영.

시혁은 나영이 좋았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시원시원했으니까. 괜히 내숭 떨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 털털함이, 그 순수함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았다. 사실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는 상당히 많았다. 세상에 게임하고, 운동 잘하고, 할리우드 액션 영화 좋아하는, 그런 여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애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 사실은……”

이제 무슨 일이 생길까?

시혁은 눈앞이 새까맣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죽을 거다. 이만한 행운이라면, 분명 죽는다. 아니, 불행.

그러니 이것만큼은 행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만은 불행해야 한다. 더럽게 끔찍한 일이지만. 굴러온 복을 차내야 하지만. 그게 모두에게 이익이다.

죽어서는 안 된다.

죽여서도 안 된다.

어떻게든, 이걸 불행으로 끝내야 한다.

시혁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고백하지 마. 나 너 싫어.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머뭇거림 사이에서, 그녀가 말했다.

“좋아해. 친구 이상으로.”

라고.

죽지는 않았다. 뭐가 부서지지도 않았고. 한심한 추태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종료.

세계가 멸망했다.

9가 3235번, 2가 94321번 들어가는 어느 세계의 종말이었다.




01 지구영웅전설



-3일차-


하늘은 핵폐기물 색이었다. 온통 희뿌연 노란색과 녹색. 푸르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온 몸이 녹색으로 물들어버릴 것 같다고, 시혁은 생각해버렸다.

「오늘의 충돌……치지직……가능성은……치직……퍼센트 이상으로……치직……위험 지역은 신의주, 원산, 평양, 서울, 그리고 남부의……치직……이겠습니다. 모쪼록 음악을 틀어주시기 바립니다.」

“뭐야 이거, 라디오가 제 값을 못하는데.”

시혁이 투덜거렸다.

늙어빠진 고물 라디오였다.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녹슨 물건, 안테나까지 구부러져서 제 기능을 할 것인가부터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퉁, 라디오를 두들겼다. 안 그래도 우그러진 물건이 시혁의 일격에 더 우그러졌다. 시혁의 입장에서는 기계는 때려줘야 제 맛, 이라는 격언을 실현한 것에 불과했지만, 라디오는 짧은 소리와 함께 죽어버렸을 뿐이었다.

“열심히 페달을 밟은 게, 별 효과가 없잖아.”

시혁은 짜증이 나 고물더미 아래로 라디오를 던져버렸다. 삐죽한 고물의 비탈 아래로 라디오가 통통 굴러 떨어졌다.

정말이지 고생을 했는데. 그는 생각했다.

점심부터 페달을 밟아야만 했다. 태양은 미치도록 따갑고, 강철프레임만 남은 자전거는 계란 익히는 데 쓰는 게 더 나은 날이었는데.

“운이 없네. 응응.”

옆에서 나영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의 헛고생 따위, 사실 난 신경 쓰지 않아. 라는 투의 상쾌한 웃음이었다.

그녀가 이 모든, 짧은 비극의 원흉이었다.

이 세상은 전기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런 잡다한 기기를 쓸 정도의 전력은 자체 생산해야만 했다. 사실 아주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냉장고나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차라리 쓰레기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드는 게 더 나은 것 같았다. 이 주변에 널린 게 쓰레기니까. 타는 쓰레기의 숫자가 좀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찾으면 충분히 나왔다. 아니, 매일 먹는 과자 봉지만 모아도 충분할 듯 했다. 그 ‘여자’는 밥 대신 과자만 먹어댔으니까.

그러나 나영은 언제나 그 주장을 반대했다. 지구의 환경을 생각해야 해요, 운동을 해야 더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어요, 닥치고 따르란 말이다 하는 등등. 무엇하나 제대로 된 주장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내 인생은 이따위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야?”

“그런 생각한 적 없다만.”

오히려 ‘네 인생은 왜 그런 식이냐?’를 생각했을 뿐이다.

시혁은 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컨테이너 박스 위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 주워온 파라솔과 탁자.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홍차와 지나치게 달아 보이는 과자들이 있었다. 그 자신이 더워서인지 컨테이너 박스가 너무 뜨거워 보였다.

“안 덥냐?”

“여자는 좀 태워줘야 한데.”

“여자도 아닌 게 무슨.”

산머슴도 여자냐?

“뭐라고 하셨나요?”

“아름다우십니다.”

역시 내 미모는 세계 제일이라니까? 너도 역시 그걸 알아준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홍차를 입에 대었다. 제멋대로의 귀축. 그게 그녀에 대한 가장 완벽한 요약이었다. 물론 대놓고 말한다면 시혁은 가루가 될 예정이지만. 멋진 인생이야, 그는 생각했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여자애에게 끌려 다니면서 좋아하는 것은 라이트노벨에 나오는 변태 같고 바보 같은 주인공들뿐이다. 변태라는 시점에서 이미 좋아한다는 게 확정되었기는 했지만.

“너도 한잔 할래?”

나영이 홍차를 한잔 내밀었다.

“별로.”

더워 죽겠는데 무슨.

맛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도 전에 마셔본 적은 있지만, 매우 맛이 좋은 물건이었다. 단지 뜨거운 게 싫을 뿐이지. 여름에 그런 걸 먹을 정도로 시혁은 변태가 아니었다.

그 거절에 나영은 잠시 머쓱한 눈으로 시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느이 집에는 이거 없지?”

“누님.”

시혁은 재빠르게 홍차를 받았다.

안 받았다가는 닭부터 모가지 잘릴 기세. 막판에 동백꽃 H씬은 좋지만 그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험난하다. 그 전에 베드엔딩을 맞이할지도. 예를 들면 소녀가 너무 열 받아서 부잣집의 돌쇠 등을 이끌고 소년을 잡아가, 뒷간에 가두고 조교를 했다던가 등등 말이다.

“맛있지?”

나영의 질문에 시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끓인 솜씨는 별로인 것 같았지만, 원판이 워낙에 좋다보니 마실만했다. 소녀가 어떻게 그래 좋은 홍차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별 거 없다. 다른 사람이 사둔 것을 그냥 슬쩍 꺼내온 것뿐이니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애당초 시혁과 나영, 그리고 ‘그녀’ 빼고는 아무도 없다.

여기는 부산.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라고는 없는 폐허의 도시였다.

폐허치고 썩어가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썩을만한 것은 이미 다 먹혀버렸으니까. 오히려 잡초들이 무성하고, 덩굴들이 건물을 뒤덮어 운치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원들처럼 말이다.

여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종말 후다.

삐죽거리는 고물들과, 컨테이너의 산 속에서, 시혁은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앞에는 체스판이 하나 있었다. 어디서 주워온 지 모를 고급품이었다. 그는 그걸 가지고 놀았다. 몇 달인지, 몇 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여하튼 자주 가지고 놀았다. 여덟 개의 퀸을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하거나, 나이트 하나로 64개의 칸을 전부 한 번 씩 겹치지 않고 가는 등의 그러한 문제로 말이다. 대국을 둘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그런 체스를 하지 않으니까.

“그런 머리 아픈 걸 왜 해?”

하고는 책을 잡았다.

“그런 지루한 걸 왜 해?”

라고 소년이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시혁은 나이트 하나를 옮겼다. 지금 그는 흑차례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퀸, 킹, 그리고 나이트 하나로 거의 온전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적을 처리하는 게임이었다.

얼핏 보면 시혁이 굉장한 사람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할 것 없는 폐허에서는 지겨워 죽지 않으려면 이런 일이 필요하다. 아니, 그 전에 그는 게임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중증 게임 중독자에 불과했다.

퀸을 잡아내며, 그가 말했다.

“이제 그럼 오는 지 안 오는 지는 잘 모르겠어.”

온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런가?”

소녀는 여느 때처럼 실실 웃었다.

“그딴 거, 사실 안 들어봐도 되잖아?”

나영은 마시던 홍차를 쭈욱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더운 날에 오뎅국물 들이키고도 시원하다 할 여자였다.

“왜 안 들어도 되는 건데?”

“당연하잖아?”

나영은 히죽거렸다. 좋아 죽겠다는 마냥.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 거대한 기체가 떴다. 축구장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비행선. 공중모함이었다.

“멀리, 엔진 소리가 들리니까 말이야.”

소년이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소녀는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컨테이너 박스 위에서 뛰어 내렸다.

“기계 촉수고 메카닉 미소녀고 없지만!”

이상한 말들을 외치며, 나영은 쓰레기 더미 속의 오디오로 걸어갔다.

“시작하자고!”

뚜우---------

온 도시에 울리는 공명소리. 가정 안의 스피커에서, 민방위 훈련을 알렸던 설치물에서, 온 도시에서 모인 스피커의 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Part Rock! Party Rock is in the House tonight-

쿵, 쿵, 클럽에서나 듣는 강렬한 비트가 귀를 때렸다. 그것도 온 도시에서.

“난 이게 싫더라.”

시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도시가 울린다. 쿵! 쿵! 그 박자에 맞춰서 스피커가 떨리고, 건물이 진동한다. 오래된 부스러기들이 건물에서 떨어져 내렸다. 비행기보다도 거대한 새들이 놀라 하늘로 달아났다. 나영의 컨테이너 박스도, 시혁의 탁자도, 모두 다 들썩였다. 진동에 체스판 위의 말들이 떨어진다.

공중모함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거대한 바람이 그의 몸을 스쳤다. 잠깐 태양이 가리어 어두웠다. 그러나 그도 잠시, 레이저 스캐너가 빛을 내며 일대를 한 번 쑥 훑었다. 소년과 소녀도 마치 바코드처럼 스캔 되었다.

“때가 된 건가?”

소년은 중얼거렸다.

“오래간만이야~!”

소녀가 외쳤지만, 음악소리에 묻혀 소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위이잉-!

항공모함의 바닥부가 열렸다. 마치 UFO처럼. 붉은 색 레이저들이 바닥의 일부를 표시했다.

기왕 죽일 거면 미사일 같은 게 더 깔끔할 텐데, 굳이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할 정도로 세상은 까다로운 걸까? 시혁은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마치 스토리 한 번 깨면 그만인 게임을 베테랑으로 올 클리어 하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쿵! 쿵!

Everyday I'm Shufflin. Shufflin. Shufflin.

모함들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거대한 강철 재질의 무언가.

로봇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멋들어지게 생긴 로봇.

도무지 효율성이라고는 없었다. 생긴 거야 물론 모든 무기 중에서 최고지만은. 이족 보행 로봇이라는 점에서 이미 아웃이었다. 왜 조상이란 놈들은 이런 로봇을 만들어서 종말을 자초했을까?

시혁은 약간 아쉬웠다.

멸망하지 않아서, 저 옛날 기술로 게임을 하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한다면 이런 고철 덩어리들 속에서 체스말을 놀리는 대신 오래된 소설책에서나 본, 가상현실게임이라는 걸 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로봇들이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 배는 커다란 강철의 괴물이 파티 음악 속에서 희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죽을 수 있다.

손아귀로 몸을 터트릴 수도 있다. 밟아 죽일 수도 있고. 총을 쏠 수도 있고. 무가치하게 큼지막한 미사일을 날릴 수도 있었다.

허나 소녀, 나영은 아무런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당당하게, 얼마 있지도 않은 가슴을 쫙 펴고, 로봇들에게 명령했다.

“춤추라고!”

부리부리하게 두 눈을 빛내면서, 입에는 이죽이죽 웃음을 띠우면서.

그녀와 로봇이 잠시 대치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로봇들은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Everyday I'm Shufflin. Shufflin. Shufflin.

우스꽝스러운 비트.

쿵! 쿵! 발소리에 도시가 울린다. 수 톤의 기체가 끼릭거리며, 거대한 제 몸을 움직인다. 소녀가 거인이라도 조종하는 모양새였다.

이에 나영은 재미있다는 듯

“Yeah~ Fuck up~!”

라고 외치며 같이 춤추었다.

시혁은 한숨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정시혁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나영은 약간 특이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세계는 언제나 종말을 마주하지 않았고, 지금도 맞이한 적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이 모든 괴상함은. 시혁이 지금도 테이블에 송곳으로 꽂아 놓은 한 누런 종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독서 퀴즈대회. 우승자 상품: 휴대용 게임기.」




-1일차-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도시도 멸망하지 않았으며.

모든 건 정상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말이다.

현재 위치는 시립도서관의 지하, 휴게실. 주변에는 같이 공부하는 것을 빙자해 수다를 떨고 있는 이들이 널려 있었다.

시혁은 눈앞에 쌓인 책들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읽는 사람의 머릿속을 갉아 먹는 종이뭉치들이었다. 그는 기지개를 폈다.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조금 일렀다. 그래도 조금 쉬면 좋지 않을까. 시혁은 빤히 나영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환상종이 있었다. ‘여자인’ 소꿉친구라는 되지도 않을 인격체 말이다. 그러나 여자인 소꿉친구는 분명 눈앞에 존재했다. 그리고 현실이었다. 미연시처럼 ‘오래전부터 널 좋아해왔어.’라는 말도 없고, ‘미묘하게 그 씬을 해야 할’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애교나 섹시함은 물론 없는 여자애. 오히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그런 여자.

나영이 불쑥 물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할까?”

일반적인 질문.

전혀 문제없는, 평이함 그 자체. 시혁도 그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아니, 사실 문제가 생겼기는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하드코어 했다. 하지만 과거에도 이만큼의 문제는 숱하게 많았고 앞으로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고로 아직까지는 평범한 시점. 시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수학? 아무래도 대학 가려면 수학이 가장 중요하잖아.”

“이런, 이런. 천하의 정시혁이 어떻게 이런 무던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거냐. 수학이 중요할 리가 없지. 일반인이 살아가면서 방정식 이상 쓰는 거 본 적 있냐? 게다가 제대로 된 수학도 아니잖아? 하루하루 문제만 푸는 기계일 뿐이지. 교육부의 새디즘일 뿐이야. 국가적 음모지.”

단순한 과목이 국가적 음모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영어? 게임하려면 영어는 필요해.”

“Nice to meet you.”

"Nice to meet you, t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May the Force be with you. Fus Ro Dah!!!"

"I'm your father."

“영어는 잘하는군.”

“게임 해야 하잖아.”

한글 패치를 기다리는 건 너무 늦는 일이라고, 시혁은 생각했다.

“그렇군. 근데 정답은 아니야. 물론 잘하면 좋기는 한데. 영어 없어도 살 수 있잖아. 게다가 영어가 가장 중요했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멸망했을 걸? 8년 영어 배워도 회화 못하는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럼 국어이겠군. 조선의 궁궐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나썬 이여. 이건 생활에 꼭 필요하니까.”

“가엾고 딱한 자로다! 이제 이 나라의 과학의 막강한 힘에 짓밟히고 말 것이거늘!”

“왜 바로 선전포고 대응이냐!”

한 것은 분명 최초 접견 환영사였는데!

“뭐, 국어가 재미있는 건 사실인데 가장 중요하다고 보기는 좀 힘들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라 같은 게 좋기는 한데, 중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잖아? 실생활에 별로 도움도 안 되고 말이야.”

“하긴.”

그러면,

“사회?”

“사회? 사회는 그저 종이의 페이지 수나 차지하는 잉여일 뿐이지. 사회 공부해봐. 뭐가 나와? 밥? 물론 밥이 안 나와도 중요한 건 많아. 그런데 다른 것도 안 나오잖아. 윤리 공부해서 윤리적 인간이 되나? 지리 공부해서 여러 개 외우면 인생에 특별히 뭐가 좋지? 역사는 몸에 좋지만, 대충 겉만 배우고 말잖아? 그런데 말이지, 거기에 대학가는 건 이과보다 더럽게 어렵단 말이지. 그래, 그런 거 넘어가자.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갔다 치자고, 근데 그 다음에, 사회 가서 뭐 할 거야? 회사원? 꿈도 희망도 없는 안타까운 과목일 뿐이야, 사회는. 물론 경제는 쓸 만하지만 말이지. 돈은 좋은 겁니다.”

그럼 이제 뭐지? 그는 생각해 보았다.

“과학이냐? 그래도 과학은 밥을 먹여주잖아?”

“천한 공돌이 놈들 따위. 물론 세상에 이득이야 되지. 아주 좋은 과목이야. 그러나 당사자한테 좋은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 아침, 실험실, 점심, 실험실, 저녁, 실험실으로 살라지. 괜히 그런 이상한 공부나 해서 나중에 영어 강의로 헬게이트 열 일 있나? 솔로 공대 따위. 공돌 냄새 나. 천하고 천해.”

나영은 문과다.

“아, 알겠다. 몸 튼튼, 체육이겠군. 체육은 좋은 과목이지.”

“체육은 자습시간에 불과하다.”

“예술이라고는 하지마. 미술 안 된다. 음악 안 된다.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어.”

“당연히 아니야.”

“그럼 도대체 뭐야?”

국영수사과, 거기에 예체능 전부 제외. 이제는 남은 것이 없다. 그 말에 나영은 피식 비 웃어버렸다.

“이거, 이거, 창의력이 부족하단 말이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게 부족한 건가? 이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

“뜸 들이지 마.”

두둥! 제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그녀가 선언했다.

“당연히 기술 가정이지!”

“……응?”

“……뭐야 그 세계 멸망을 감지하는 북어 같은 표정은?”

“기술 가정?”

“응.”

무척 당연하다는 어투였다.

“매번 쓸데없이 이상한 거 만지작거리는 기술가정?”

“무슨 멍청한 소리야?”

그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섹스와 밥과 공돌이 짓을 가르치는 과목이잖아?

“저기, 너 여자 맞지?”

“왜, 보면 몰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냐?”

물론 소꿉친구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한 지기지만 말이지. 이건 너무 개방적이다 싶은데.

“네가 남자였던가? 뭔가 달려 있었던 것도 같은데.”

“너도 큰 편은 아니다.”

“그만하지.”

잠시 대화의 밀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것 같았다.

“근데 무슨 소리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냈지?”

쓸데없는 소리가 너무 길어서 요지가 뭔지조차 잊어버렸다.

“네 지루해하는 표정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특급작전이었지, 제군.”

“오늘 들어서만 그 특급 작전 소리를 세 번이나 듣네.”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지금 시혁의 관점에서 보던데, 전에 나온 특급 작전들은 모두 다 파국의 전조였다.

‘머리 한 구석이 미쳐있는 게 분명해.’

분명히. 이 학교를 포함해서.

그리고 지금 시혁이 잡으려는 책도 그 광기의 한 부분이었다.

소녀경().

“근데 왜 이런 게 추천도서에 들어 있는 거야?”

시혁은 자신의 손에 잡고 있던 책을 파락 넘겼다. 소녀경이었다. 소위 말하는 음양의 교접에 대한…… 실전적인…… 가이드북이라고 해야……

하기는 한데, 이걸 도대체 왜 고등학교 독서 퀴즈 대회 도서목록에 두었는가. 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인 기술 가정의 핵심! 체육의 유일한 이론 교육 부분인 성교육의 반영이다. 이 말이지.”

“근데 이건 좀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덜 분출하면서 오래 할 수 있는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무슨 소리야? 1970년대에 중학교 권장도서였는데?”

“뭐?”

“그때도 빨랐나보군. 하긴 소나기에서 소녀가 소년 등에 업히기만 했을 리는 없지.”

“뭔가 대단위로 모욕적인 언사인 것 같다만.”

“물론 우리 담임선생님의 특별 취향이 반영되었겠지만 말이야. 호호호.”

마녀. 아줌마. 노처녀.

시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확실히 그 징그럽고 무서운 인간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시험 문제에 장난삼아,

다음 중 정확한 것을 고르시오. (후환은 없다.)

1. 출제자 선생님은 매우 예쁘다.

2. 출제자 선생님은 꽤 예쁘다.

3. 출제자 선생님은 예쁘다.

4. 출제자 선생님은 별로 예쁘지 않다.

5. 출제자 선생님은 마녀 같다.

라고 냈던 군자니까 말이다.

시혁은 사회를 믿는 한 청소년으로써 5번을 눌렀었고, 많은 청소년이 그와 같은 행위를 했다. 그러나 앞의 설명과 다르게 후환은 막심했다. 수업 중에 5번 누른 사람만 일어나거나, 벌이 더 강해지거나, 시비가 온다거나 등등.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도서목록을 집필한 거지?”

시혁이 물었다. 확실히 도서목록은 괴물 같았다. 읽을 수 없는 괴물 같은 글들의 끝조차 보이지 않는 나열. 마치 시나리오만 쓸데없이 긴 소설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혹은 스킵조차 안 되는 미연시나, 말이다.

“읽어보면 쉽다고?”

나영이 책을 하나 끌고 왔다. 대략 500p는 되어봄직한 묵직한 물건. 둔기로 쓰기 딱 좋아보였다. 어떤 2d 횡스크롤 게임의 빨간책처럼 말이다.

제목은 ‘자본론’

「상품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물건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어떠한가, 예컨대 욕망이 위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환상으로부터 생기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물건이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키는가, 즉 생활수단으로서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으로서 간접적으로 만족시키는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는데, 이해 되냐?”

뭔가 글자도 많고 한국어인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 그에 나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간단하지. 이걸 어떻게 이해 못 해?”

“내용 뭔데.”

“자본주의 까는 거잖아. 잘 봐봐. 상품은……욕망을……채워주는 거다.”

“대충 단어만 조합하지 마!”

“그냥 공산주의 만세잖아!”

“뭔 소리야!”

“다음, 다음 권.”

훌쩍 다음 책으로 넘기는 나영이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의 작품이지!”

그렇게 외치며 오픈.

「우리의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어진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이 대상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작동하도록 일깨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상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주어 부분적으로는 스스로 표상들을 산출하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지성이 활동하도록 만든다.」

“…….”

“…….”

약간의 침묵. 나영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얘는 솔직히 좀 오버인듯.”

“그렇지?”

나영은 빠르게 책을 바꾸었다.

새하얀 커버에 파란 줄이 그어진 고교생의 필독서였다. 아니, 시혁의 관점에서는 마도서였다. 교육자의 새디즘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책.

“수학의 정석…….”

시혁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500p에 가까운 수학책 4권이 표지를 반짝이며 그의 앞에 놓아져 있었다.

“이걸 다 어떻게 읽어? 특히 수학의 정석은 정말이지 끔찍해.”

“에? 수학의 정석은 별로 안 끔찍한데? 뭐랄까, 괜찮잖아?”

“너님 수학 잘한다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수학 귀여운데?”

“넌 방금 수많은 학생을 적으로 돌렸다.”

“아니, 아니,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 봐.”

나영은 웃으며 말했다.

“일단 눈을 감아, 심호흡 하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거 뭔가 명상 같은데?”

“수학 잘하고 싶으면 들어.”

시혁은 눈을 감았다.

나영이 그에게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수학은, 아~주 조심스러운 아이야. 조금만 마음을 못 맞추어도, 그대로 울어버리고 말지. 난이도 SSS의 최고 공략대상, 진히로인 같은 존재야. 이제 그 외모가 상상되지?”

시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지만, 마음에 꼭 들지만, 할 수는 없는, 최종 병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너는 옛날부터 정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어. 알기 쉽고, 간단한 아이였었지. 그런데 점점 아이의 마음은 어려워져갔어. 분수가 들어가면서 그 마음이 나뉘어졌지. 마치 여자의 오락가락하는 모습처럼 말이야. 허나 분모가 언제나 그렇듯, 무엇이 더해지고 빼져도 너에 대한 마음은 항상 같았어.”

보였다. 점점 성숙해져가는 아이가.

“점점 고난은 심해져 갔어. 정수는 가끔 무리수로 변해, 이해할 수도 없는 무한한 배열로 너를 옭아매었지. 게다가 악당도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끝없는 수의 동그란 파이가, 내용을 알 수 없는 함수가 너를 괴롭히기도 했어. 마지막에는 삼각함수까지. 허나 너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새로운 스테이지까지 도달했지.”

소녀를 지키기 위한 고난이 마음속에 박혔다. 그래, 그까지는 시혁도 수학과 아름다운 시절을 꿈꾸었던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 무섭지만 소녀와 함께 너는 나아갔지. 그녀를 새롭게 배워나가고, 그녀 속의 무의식, 허수까지 알아나갔지. 가끔 이상한 말로 너를 괴롭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는 괜찮게 살아갔어. 곧 나올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며 말이지. 그런데 그래프가 나와. 넓은 대지 위의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난제들.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하나씩 그 함수라는 괴물들을 끌어내리고, 잡아나가면 결국에는 만나게 돼.”

소년은 흥미진진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삼각함수, 불가해의 마왕. 많은 소년이 여기서 무너지지. 너도 그랬고. 허나, 들어봐. 아직은 미래가 더 있으니까. 지금부터 노력한다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찬란한 미래야.”

무의식 중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렬까지는 행복해. 허나 여기서 두 괴물이 등장하지. 공략대상, 역전의 로그와 질서의 수열. 하나는 로리이고, 하나는 누님이야. 이 둘이 너에게 달라붙어, 둘 다 얀데레 속성이 있어서, 매몰차게 거절하면 너는 죽는 거고. 둘에게 충분한 사랑을 못 주었다고 생각하면 진짜 히로인이 둘에게 썰려 죽어. 무시무시한 상황이지. 허나 너는 하나 밖에 없는 몸을 열심히 놀려 세 사람분의 일을 해. 모두에게 사랑을 베푼 거지.”

“감동적이네.”

해본 적이 있었다. 세 명 사이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최소 수치의 만족도를 채우는 일. 더럽게 어렵고, 어렵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다시 시작을 수 번 눌렀으리라.

“근데, 이제는 미적분이 등장했어. 최악의 괴물. 파괴의 악마. 그녀는 너를 손에 넣고 싶어 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인격이 망가지던, 히로인이 죽던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아. 숱하게 찾아오는 정신 공격, 암살의 위협에서 네 몸과 히로인을 지켜야 해. 버튼 하나만 잘못 누르면 죽어. 선택지 하나 잘못 눌러도 죽어. 모든 말을 그녀의 마음에 들게 해야만 해. 언젠가 너는 감옥에 가게 될 거야. 미적분이 너를 사육하려는 감옥. 남은 건 입뿐이고. 그걸 만족시켜야만 하지. 거기서 살아만 나가면. 해피엔딩이야.”

약간의 한숨. 나영은 말을 이었다.

“넌, 수학이라는 소녀를 죽였어. 물론 지금부터 다시 해서 해피엔딩을 만들 수도 있어. 선택은 네 몫이야.”

시혁은 침묵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1학년 때 폐기한, 수학을 다시 꺼낼지 말지를. 그때 나영이 계속했다.

“사실, h씬이 없었던 건 아니야. 중간에 플래그도 많았어. 방정식 때는, x를 넣어달라고 했었지. 이후에는 x를, y를. 심지어는 z를. 이진법으로 새로운 플레이를 고안하기도 했지. x를 넣어. x를!”

“무슨 소리냐?!”

이 여자. 변태다.

확실했다.

‘내 현실적이고 평범한 소꿉친구는 제 친구에게 모든 비틀린 욕망을 푸는 나쁜 여자입니다.’

시혁은 풀썩 책상에 엎드렸다.

“수학 따위.”

그리고 처참하게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대로라면 PSP는 무리야. 책들이 너무 괴상해.”

“야망을 가져라, 소년.”

“무리.”

“아니, 할 수 있어. 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괴상한 책들을 읽지 않아도, 너는 PSP를 탈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만, 있다면 말이지. 특급작전이다. 시작하자고.”

파국이 예상되었다.

소녀는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소년은 또다시 그 유혹에 굴복했다.

현재 1일차.

시혁의 사건은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시간 오전 8시 32분.

위치는 부산 대경고 1층, 2학년 3반 교실 앞.

“외워두어라. 기억해둘 가치가 있을 것이니.”

시혁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일생에서 오늘은 대단한 날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의 인생사상 가장 기록될 가치가 있는 날이 될 것이다. 왜냐? 지금, 그는 새로운 기회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물질의 한계를 뛰어 넘을 기회! 그것이 벽보에 걸려 있었다.

「우승자 상품: 휴대용 게임기.」

그 휴대용 게임기가 무엇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사진으로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PSP(Play Style Portable)다. 어느 게임기랑 비슷한 이름 같지만 여하튼 그거다!

그는 웃었다.

“이 따위, 가볍게 돌파해주지.”

「실시일: 6월 23일.」

현재 6월 8일. 남은 날은 15일. 기말고사 5일 클리어 경험자에게 이건 별 것 아닌 일일 뿐이다.

「2등 세계문학시리즈. 3등 도서상품권 2만원.」

2, 3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도서 상품권은 서점에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굉장히 악랄한 수이다. 이렇게 1등 아니면 되지 않는다고. 세상은 그에게 고하고 있었다. 물론 사용은 어떻게든 될 거다. 2만원어치를 들고 만원이 안 되는 게임 관련 도서를 사면 그 뿐이다. 허나 그렇게 되면 남는 돈이 고작 1만원이다. 이래가지고는, 티* 캐릭터에 스킨 조금 겨우 살까 싶은데. 캡틴 티*. 초보자는 할 수도 없지!

그 전에 PSP로 하루 종일, 학교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저녁 시간에, 집에 가는 시간에, 잠자는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것이 바로 그의 꿈이었다.

「실시 장소: 체육관.」

다 좋다.

다른 것도 모두 다 정상.

여백 저 밑 편에 자그마한 글씨로,

「주의 사항: 학교지기가 법이다.」

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시혁은 무시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나이다. 아니, 법이 없었으면 좋을 텐데.

일단 전체적으로 봤을 때, 순탄해보였다.

물론 난관이 없지는 않았다.

「담당자: 3반 담임 짱♡」

허나 이길 수는 있으리라. 그의 집념은, 그런 가벼운 난관에 굴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는 이길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저런 가벼운 난관은 그저 영웅담의 소재일 뿐이다.

다만, 단 한 가지 걸리는 건.

「참고 도서: 약 150권,」

물론 책이라고는 읽어본 적이 없다. 그 시간에 게임해야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책인가? 책이 밥을 먹여주나, 게임을 시켜주나?

허나 인간이 24시간 잠을 안자고 책을 읽는다면, 그것도 게임 텍스트 읽는 속도로 책을 본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대략 1시간에 1권. 150시간이면 다 읽는다. 그 시간이면, 잠 푹 자고도 남는다.

-라는 말 따위는.

「1. 자본론/ 칼 마르크스」

라는 명단을 보지 않은 자의 객기에 불과했다.





1교시 쉬는 시간. 2학년 3반 교실.

“어제 세계라도 멸망했던 거야?”

나영은, 그렇게 되지도 않을 말을 했다. 그러나 시혁의 귀에는 그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히려 선물을 앞둔 어린애의 표정으로 들떴을 뿐이다.

“이건 현실이야. 현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은 진심이라고!”

그 말에 그녀는 머리를 붙잡으며, 세상이 멸망하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세계는 내일 멸망하는 거구나.”

이제는 꿈도 희망도 없어, 내 꿈들도 이제는 안녕. 그녀는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의 행동이 어디가 잘못 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공부 한 번 해본 적 없는, I가 명사인지 동사인지도 모르는 전교 꼴등이 서울대에 가겠다고 선언할 때, 인간은 충분히 저런 반응을 보일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도 비슷했다.

“독서대회 1등을 하겠다니……. 혹시 양호 선생님이 주시는 약이라도 먹은 거야? 그거 위험한데?”

“난 미치지 않았어. 맛이 가지도 않았다고.”

“잠깐, 그럼 담임선생님 때문에? 그렇지? 그 지루한 수학의 폭풍 속에서 살아있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정신이! 아아, 총체적 비극이다!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선생, 시혁이가……”

“이러지 맙시다, 우리.”

“아니, 그래도 말이지. 독서대회 우승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잖아!”

“그래봤자 독서대회인데? 못 할 게 뭐야?”

시혁이 말했다. 잠시 나영이 ‘오, 신이시여, 저 새끼를 구원하소서.’라고 중얼거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한참의 침묵. 나영이 물었다.

“야, 너 책 읽어본 적은 있냐?”

“물론이지. 소설 정도는 읽는다고.”

“게임 관련 빼고.”

“아니.”

그녀는 골을 싸맸다.

“이봐, 우리의 친애하는 정시혁 군? 이건 그냥 독서대회가 아니야. 그냥 독서대회면 우리 담임이 맡았을 리가 없지. 이건 일종의 문자대전이라고. 우승상품은 고작해야 PSP니 전집이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게 달려 있다고.”

“그런 것보다 더 대단한 거?”

“자존심.”

그 말에 시혁은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책 따위에 자존심을 거는 사람도 있어?”

그런 평화적 활동에 불꽃을 튀기는 놈은 바보뿐일 거다.

“옷과 급식에 자존심을 걸었던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닌데?”

“이해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바보뿐이었다.

“거기 나오는 애들은 일종의 괴물이야. 하루에 책 한 두 권은 너끈하게 읽는, 수년이나 머리에 책을 쌓은 괴물. 전교 최상위권, 혹은 책에 미친놈이 출전하는 경기란 말이야. 너도 급식 배틀 참가자로써 알잖아. 그거 준비 없이 못해.”

“……그런 건가.”

시혁이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 배틀 당시, 준비한 기간이 2개월이다. 푸드 파이터와 대등한 역량을 쌓고, 파쿠르 기술을 익혀야만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엄청난 난투 끝에야 승리를 할 수 있었다.

나영이 선고했다.

“너는 불가능…… 아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 활기가 돌았다. 무슨 일을 꾸미려고 할 때의 그 어마무시한 눈빛. 그러나 앞의 말에 압도된 시혁에게는 그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거,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

“뭐?”

“응? 아냐. 혼잣말이야.”

“못 들었어.”

“그냥,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정말이야?”

“그래,”

시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단 세워둔 계획은, 15일간 150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지? 그럼 하루에 10권씩. 한 권에 2시간 정도 걸린다는 것을 감안할 때, 조금 빡빡한 면은 있어. 하지만 나도 저기서 40권은 읽었단 말이지. 그거라면 내가 적당히 요약해서 이야기 해 줄 수 있어. 남은 110권은 네가 알아서 하면 되고. 어차피 이번에 기말고사 성적도 좋잖아? 주변에서도 뭐라 안 할 거야.”

“엄청나게 좋았지.”

내일 세계 멸망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읽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문제가 있어.”

“뭔데?”

“남은 보름에 110권이거든? 이거면 굉장히 빡빡해. 14일만 되도 포기하라고 권할 정도야. 그런데, 책은 어디서 구하지?”

“학교 도서관 쓰면 안 돼?”

“저번에 ‘녀석’들이 불내서 수리 중이야.”

“아, 젠장.”

‘녀석’들과 도서관부의 악연은 학교에서도 매우 유명한 일이다. 학교에서 불을 내다니, 어지간히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그 수법이 꽤나 신출귀몰한지라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립 도서관 쓰면 안 되나?”

“걔네 내일 휴관일인데?”

“오늘 가면 되잖아?”

“야자를 하셔야 합니다, 고갱님. 여기는 부산입니다.”

서울과 경기도의 학생은 야간 자율학습 따위 없지만, 여기라면 다르다. 10시까지 자율이라는 명분 아래에, 서슬 퍼런 선생의 눈초리를 피하며 학습을 해야 한다. 19금 동영상이든, 만화든, 뭐든.

“야자야 째면 되지.”

“오늘 담당 선생님이 그분이시지 말입니다. 체육의 근육 불끈 그분.”

“빠지면 죽는 거야?”

“정답. 지옥행 특급열차 예약 축하드립니다, 고갱님.”

시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빌어먹을 선생. 실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학년 때에도 ‘야자검수. 학생, 야자는?’ 이라고 하며 소위 ‘야자 엄수의 마검(+17강)’을 휘두르는 사내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리산에서 청정한 이슬을 받고 자란 나무로 만든, 때깔 좋은 각목을 가지고 근육 가득한 팔에서 나오는 풀파워로 후려친다? 아주 훅 간다. 엉덩이부터 종아리, 발까지 모두 다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게, 아픈 것에 비해 상처는 거의 없다. 요컨대, 기술이 좋다는 소리.

거기에 매 반마다 야자 빠진 사람을 찾는 세심함. 공부 하지 않는 학생을 잡아낼 수 있는 매의 눈까지 가진 완벽한 야자 머신이다.

빠지면 죽는다.

시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야자를 엄수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야자를 하면 하루의 시간이 줄어든다. 아니, 내일 도서관이 쉬니까 총합 이틀. 그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남은 시간이 13일. 읽어야 할 책은 여전히 110권. 이건 좀 무리인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사실 한 개 있기는 한데 말이지……”

그녀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는 척, 운을 땠다.

“뭔데?”

“그게 쪼~금 어렵단 말이지……?”

“지금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잖아. 뭐든지 할 거야.”

“뭐든지?”

“뭐든지. 옛날과 같이.”

“그럼 말하지.”

나영은 웃었다. 그 웃음이, 뭔가 낚시꾼의 그것인 것 같았다.

“지금 필요한 건 이거야.”

그때, 처음으로 시혁은 불안감을 느꼈다.

“꾀병.”

여기서 그만둬야 했을지도 몰랐다.

“특급작전을 시작해볼까?”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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