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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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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것이다.
글쓴이: 간조라
작성일: 12-02-05 04:50 조회: 2,344 추천: 0 비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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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자백할 이야기 중 오직 이 한 문장만이 유일무이한 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라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은 흑과 백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그처럼 이야기 또한 진실과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 모든 이야기는 회색이다. 어떤 면으로는 거짓이기도 하며 어떤 면으로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느 쪽으로 판단할 것인가는 화자의 몫이 아닌 독자의 몫이다. 이야기를 듣는 그대가 정하는 것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설혹 그것이 진정한 진실이 아니라 해도 탓하는 사람은 없다.

설혹 그것이 진정한 거짓이 아니라 해도 탓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건 진실이기도 하며, 거짓이기도 하다.

라고서문을 썼다.

그 서문에 살을 덧붙였다.

그것이 내가 쓴 소설이다.

그 소설은 조잡하기 그지없다. 어느 면이 조잡하냐고 묻는다면, 전부 다다. 문법적으로 틀렸다. 문맥적으로 맞지 않다. 문체적으로 부적합하다. 클리셰 인물이 등장한다. 갈등이 진행되지 않는다. 결말이 없다. 그야말로 조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끄럽지 않다. 설혹 조잡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쓰고 마무리 지은 소설이다. 있는 것은 소설을 완결시킨 자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아니, 정정하자.

하나뿐이‘었다.’

현재로선 그 글은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한 때 경외했던 그 소설은 당장이라도 한 자 한 자 정성껏 지우개로 지우거나 찢거나 불태우는 등 어떤 방법으로든 소설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고 내가 그런 걸 썼다는 기억조차 리셋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소설이 되었다.

한 때 칭송했던 소설이 현재 넝마가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재미있는 소설이네.”

독자가 존재했다.

독자.

책을 읽는 사람. 책을 구입하는 사람. 작가를 먹여 살리는 사람.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

나는 독자가 싫다.

싫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내 취미생활에 불필요한 존재다.

독자를 염두에 둠으로써 고민이 생긴다. 물론 고민은 나쁜 게 아니다. 고민을 함으로써 좀 더 질 높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고민을 하며 소설을 쓸 생각이 없다.

처음은 서문을 써내려가며 ‘이 대목에서 독자는 어떻게 생각할까?’부터 시작해 마지막 문단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이 글을 재미있어 할까?’까지. 하나같이 취미의 일환으로 소설을 쓸 경우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런 잡생각을 하며 소설을 쓰는 건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불자의 고행만큼이나 괴로운 수행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소설을 쓰며 단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단에도 독자를 염두하고 쓰지 않았다. 그 소설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각. 정확히 오후 5시 24분.

독자가 생겨버렸다.

방금 책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

더욱이 지금 눈앞의 독자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다.

때로는 깔깔거리고 때로는 낄낄거리기도 하며 때로는 쿠레렐거리며 웃는 괴상한 녀석이자 달마다 한 번씩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우고 결국 달성하는 괴물이다. 그 괴물은 단 한 달 동안 쓴 글로 신춘문예에 입상한 경력이 존재한다. 요컨대 소설의 프로다.

긴장이 안 될 리가 없다.

녀석이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공책을 읽어나갈 때 마다 마른 침이 넘어갔다.

이렇게 긴장할 거면 왜 녀석에게 소설을 보여주었는지 궁금하다. 아니, 현실 조작하지 말자. 나는 결단코 녀석에게 소설을 보여주기로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에게 내가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또한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도 가르쳐 준 적 없다. 학교가 파하고 오자마자 녀석이 소설을 읽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체 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엄연한 주거침입죄인 거 알아?”

나름대로 빈정거림을 한껏 담아 말해보지만.

“열려 있었어.”

공책을 읽는 녀석은 시선을 옮기지도 않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디지털 도어락이 열려 있었다는 게?”

조금 역정 내자 그때서야 녀석은 나를 바라보곤 공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공책의 위 틈으로 녀석의 맹랑한 눈이 빠끔히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주인을 닮아 맹랑한 그 눈은 얇은 곡선을 그렸다.

그 사악한 눈웃음에 녀석이 디지털 도어락의 여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하얀 가루, 전기, 물리적 침입. 외부로부터의 침입까지.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범죄성이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은 하나같이 현실이 될 수 있다.

터무니없는 가설이 현실성을 가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실행자가 녀석이니까.

“알고 싶어?”

정말로? 라고 살짝 말머리를 달아 말한다.

무언가를 앎에는 공포를 수반한다.

호기심이 일어나는 강도에 비례해 공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본다.

“됐어.”

공포에 질려, 심통을 담아 말해본다.

"재미없네."

그에 녀석은 마치 도발하듯 오른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하품을 했다.

저급한 도발. 언제나 그렇듯 그러한 도발은 무시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고 있다. 그 때 마다 다음번에는 걸리지 말자, 라고 다짐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걸려들고 만다.

오늘은 다르다.

부끄럼에 물들어 있다. 그 요소가 추가되었기에 오늘은 반대로 평정을 유지 할 수 있다.

생각해라.

어떻게 하면 녀석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테고…”

아쉬움이 남도록 살짝 말끝을 흐린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도발에 대한 최대의 저항이자 어부의 마음가짐으로 던지는 문드러진 낚시 줄이다.

이것은 결코 도발에 걸려드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녀석을… 더 자신을 속이지 말자.

나는 언제나 그랬듯, 녀석의 도발에 걸려 든 것이다.

부끄럼에 물들어 있던, 물들어 있지 않던 내가 녀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주사위를 던지면 무조건 6이 나올 것만 같은 녀석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아니, 지극히도 정상적인 방법이야. 난 문을 열고 들어왔어."

내 의중을 파악했을 녀석은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으며 낚시 줄을 물어주었다.

고마운 녀석이다. 정말로.

나는 녀석의 발언을 근거로 시작해 추리를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한 녀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된 네 가지 가정 중 하나인 외부로부터의 침입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남은 건 하얀 밀가루, 전기, 물리적 침입.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녀석은 하얀 밀가루를 도어락에 뿌리고 붓으로 살살 털어낸다. 호러물의 한 장면이나 다름없다.

“알려줄까?”

녀석은 책을 책상에 스리슬쩍 내려놓곤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앞뒤로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알려줄까?”

혀를 살짝 굴려 재차 말하는 녀석의 의도는 분명하다.

놀림.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녀석은 디지털 도어락의 문을 열고 주거침입을 행했을까. 그러나 이 대로 녀석의 싸구려 도발에 더 이상 결려 드는 건 알량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전혀 궁금하지 않아.”

담담한 듯, 연기한다.

“전혀?”

그럴수록 녀석의 입가에 미소는 번진다.

언제나 그랬듯, 녀석에게 새침을 떼는 건 먹히지 않는다.

“전혀.”

배에 힘을 가득주고 애써 허세부리 듯 말한다.

새침을 떼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지켜야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 요컨대 명예라든지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지금의 경우에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어느 순간 녀석이 앉은 의자의 휘청거림이 멈췄다.

“그래? 그럼 영원히 안 말해줄 거야. 어떻게 할래?”

녀석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나는 빤히 녀석을 쳐다봤다.

어깨까지 살짝 닿는 옅은 갈색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닮은 색의 안경테, 그 속에 닮긴 이지를 담고 있는 눈.

언제나 무표정인 주제에 나를 놀릴 때만 미소 짓는 약간 마른 입술.

녀석의 모습은 실로 괴물이자, 마녀다운 모습이다. 달콤한 선악과를 내놓는.

저 마녀는 언제나 달콤한 향기의 열매로 미끼로 꽁꽁 숨겨둔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그러면 그 호기심은 언제나 그랬듯 공포도 알량한 자존심도 깡그리 날려 버린다.

녀석에 의해 일어난 궁금한 마음과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치고 박고 싸운다.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 같은 건 영원히 몰라도 상관없다. 그것은 결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 아니다. 라고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말하면 궁금한 마음은 곧장 녀석에게 져도 죽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사는 동물이 아니다. 라고 반격한다.

언제나 이런 구도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나는 아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래 네가 옳아!’하며 한 수 접는다. 지금처럼.

“…가르쳐줘.”

비참한 목소리에 녀석은 능글맞게 웃었다.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 꼬리는 고양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너무 웃으면 상처 받겠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그걸 아니까, 그런 거야.”

“어련하실까.”

나름대로 녀석의 기분이 최대한 상하게 빈정거렸다.

삐진 사람의 치졸한 대응에 불과했지만, 시도는 훌륭했다.

“이제 놀리는 건 그만할게. 어떤 풍이 좋을까.”

녀석이 놀린다는 것을 그만 둔다 선언하는 건 이래적인 일이니까. 녀석의 대화에서 놀림을 빼면 무엇이 남을지 궁금하다. 정말로, 정말로 놀리는 것을 그만 둔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해보면 놀린다고 그만두는 것조차도 놀리는 것이다. 고작 내가 놀림감이었다는 소리니까.

일순, 녀석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이게 좋겠어.”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녀석은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몇 번 큼큼 거렸다.

만화에 등장하는 소년 탐정처럼 검지와 약지를 접고 나머지 손가락을 핀 오른손을 내밀었다.

“힌트는 세 가지!”

애써 목소리를 굴게 하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는지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대로 안 되네.”

“넌 성우가 아니니까.”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어쩌면 녀석은 이 아무 것도 아닌 말의 계기로 다음 달의 목표를 성우로 정할지도 몰랐다. 정하고 나면 녀석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완벽한 성우가 될 것이다. 목소리를 자유자제로 바꾸는 녀석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녀석은 자신의 생각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재차 목소리를 내리 깔며 말했다.

집요한 녀석.

“첫 번째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4에서 19자리 숫자라는 것.”

"그게 무슨 힌트야."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와트슨군, 자네는 조용히 하게."

"와트슨?"

왓슨을 말하는 것일까?

"탐정의 추리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듣겠네. 뭐,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 반론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지만말일세"

어색한 연기에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자칭 탐정인 녀석의 심기를 더 이상 거스르면 오늘 중으로 추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청중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녀석은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힌트는 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디지털 도어락은 변하지 않았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놀라는 나를 녀석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너무나도 깔끔해서 마치 내가 놀란 적도 없는 것 같다.

"세 번째 힌트는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것은 와트슨 군이라는 것. 이상의 힌트로 디지털 도어락은 단 5초 만에 풀렸지."

“그 힌트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감도 안 잡히는데?”

“그게 바로 셜록과 와트슨의 차이점이지. 다음 이 시간까지 내가 어떻게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알 수 있었는지 생각해와. 숙제야.”

“숙제? 상품은 있냐?”

심드렁하게 반응하면서도 내 손가락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잡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첫 번째 힌트는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4에서 19자리라는 것.

두 번째 힌트는 사 년 전부터 디지털 도어락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

세 번째 힌트는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건 나라는 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하여튼 숙제라면 숙제인 줄 알아. 상품은 없어도 벌칙은 있으니까!"

그야말로 엉터리 녀석이다. 이토록 제멋대로 행동하는 녀석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 피곤해라.”

녀석은 갑작스레 의자에서 일어나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피곤을 해소하려는 녀석의 의도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녀석의 몸이 닿을 종착지가 내 몸이 있는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곧장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소리쳐 보지만 녀석은 능청조차 떨지 않는다. 정말로 졸린 듯 눈을 비빌 뿐이다.

“피곤해. 어째서 안락의자도 없는 거야.”

녀석에게 평범한 반응을 원하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슬펐다.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버려서, 슬펐다.

"평범한 원룸에 뭘 바라냐."

“주인을 꼭 닮은 방이네.”

나는 녀석이 책상 위에 내려둔 소설 공책을 침대에 누워 있는 녀석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종착지인 녀석의 얼굴에 도착했다.

“아얏.”

"소설이나 마저 읽고, 빨리 집에 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은 소설 공책을 내게 던졌다. 복수가 분명했지만 애석하게도 공책은 아무 죄 없는 벽을 때렸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녀석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대체 뭐가 웃긴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소설은 옛날 옛적에 다 읽었지롱."

하기야 녀석은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집에 있었다. 언제 녀석이 집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보았을 때 녀석은 꽤 오랜 시간 집에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녀석이 소설을 다 읽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럼 대체 방금 전에는 왜 소설을 읽었느냐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녀석이니까.

녀석이니까, 녀석과 관련된 모든 현상에 대한 해답이다. 이처럼 마법 같은 말이 또 있을까.

"그럼 빨리 가. 슬슬 밤이다."

명백한 축객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은 이불을 들어 덮었다.

집에는 처음 왔을 텐데 어쩜 저리 자연스럽게 행동할까.

"감상, 안 궁금해?"

감상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단순히 보여준 것만으로도 얼굴을 어떻게 들어야할지 모르겠는데, 감상까지 듣는다면 나는 부끄럽게 홍조 핀 얼굴로 내일부터 녀석을 피해 다닐지도 모른다.

"네가 무덤까지 가져가주길 빌고 있어."

애써 담담하게 말한다. 과격하게 반응한다면 녀석은 재미를 느끼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게 분명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언젠간 말하게 될 거 지금 말해주지!”

녀석은 기세 좋게 상체만을 세웠다.

나는 녀석을 너무나도 몰랐다. ‘감상, 안 궁금해?’라고 말한 시점부터 녀석은 이미 감상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설령 내가 어떤 반발을 하더라도 녀석은 결국 말하겠지.

“청개구리냐.”

어떻게든 입을 막아보고자 주제를 돌려 빈정거린다. 그것이 효력이 없음을, 설사 있다고 해도 체 몇 분가지 않을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최대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야했다.

“개굴개굴 울어줘?”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킥킥 웃었다.

웃음이 멈추고 녀석은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이내 입을 닫았다 열었다하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처음에는 개굴개굴만 했지만 갈수록 알 수 없는 멜로디가 섞여 끝에 들어서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6분가량을 개굴개굴 거린 녀석은 지쳤는지 긴박한 숨을 내쉬었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녀석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보리차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벌컥벌컥 마셨다.

살짝 마른 입술은 확실히 병 입구에 닿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열이 올랐다.

“입 대지마!”

눈을 감은 녀석은 귀도 안 들리는 것인지 보리차가 반에 반 정도 사라졌을 때야 뚜껑에서 입을 땠다. 녀석은 푸하, 하고 시원스레 숨을 내셨다.

“정말이지, 왜 안 말리는 거야. 나도 모르게 계속 불렀잖아.”

입을 대고 마신 건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여전히 무신경한 녀석이다.

“내가 말렸어야 그만 둘 생각이었냐.”

“당연하지! 이런 괴상한 행동을 하는 데 안 말릴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괴상한 행동이라고 자각은 있네.”

“당연하지! 난 언제나 상식을 준수하니까.”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녀석은 깔깔 웃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멈추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럼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감상평을 내릴게.”

지금처럼.

녀석은 차디찬 선고를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귀를 꽉 막아버리고 싶었다.

녀석의 입으로 곧 나올 평가를 듣고 싶지 않다. 그것이 호평이든 악평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평가를 받는 그 순간부터 그 글은 딱 그 정도의 수준으로 고정되니까. 호평이면 나는 그 글을 볼 때마다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고, 악평이라면 그 반대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한때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것에 너무나도 간단히 싫어하는 감정을 담는 게 싫었다. 사람은 가변적 존재라고 하지만 그 누구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는 법이다. 지금, 나 같은 경우에는 소설에 대한 이미지다.

마지막 문단의 마침표를 찍으며 느낄 수 있던 그 감정을 '싫다‘라는 감정으로 덧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녀석의 입술은 천천히 열렸다.

“솔직히 말해서 읽기 힘들었어.”

‘무엇이?’라고 묻고 싶다.

녀석이 읽기 힘들었다는 건 문체일까, 이야기의 흐름일까. 어느 쪽이든 결코 좋은 평가는 아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떠할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알 수 없는 엉망진창인 표정일 것이다.

녀석의 입술이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띄어쓰기의 간격도 문단과 문단의 사이도 작고 무엇보다도 글자 자체가 작아! 좀 더 크게 쓰란 말이야. 창용 선배가 말했듯이 넌 글씨가 깔끔하고 예쁜데 너무 작아. 물론 최근에 고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 소설에 쓰인 네 글은 너무나도 작았어.”

“그게 평가야?”

예상과 다른 감상에 헛말이 튀어나왔다.

“평가는 가장 겉 부분부터 시작해라, H.R"

“H.R … 또 네 명언이냐.”

“내 명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남이 당신을 좋게 생각해 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말라.’ 블뢰즈 파스칼.”

블뢰즈 파스칼, 낯익은 이름이다. 물론 녀석처럼 그 사람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 들었을 때 ‘아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할법한 이름이었다.

“파스칼의 계산기, 들어봤지?”

녀석의 힌트를 듣고서야 머릿속에 블뢰즈 파스칼이 그려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인물이 아니다.

“네가 앞에 한 자작 명언이랑 뒤에 파스칼의 명언 의미가 안 맞지 않아?”

“괜찮아. 시간 순으로 배열했을 때 명언의 순서는 문제없어. 나는…”

녀석은 또 무엇을 할 생각인지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 이상 학생을 평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전 학생이 저를 좋게 생각해 주길 원해요. 반했나요? 그러면 저를 캡틴이라고 부르세요. 자, 불러보세요. 캡틴!”

나름대로 성대모사라고 한 것 같지만 무슨 성대모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캡틴이라는 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르긴 했지만 내가 알기로 그 책에도 영화에도 저런 대사는 없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것부터 말할게.”

“그런 연상법, 이 캡틴은 베리 굿이라고 생각해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어째서 녀석은 이렇게 말하는 걸까. 범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기법이다. 하지만 그것을 비평하는 것 정도는 범인도 가볍게 할 수 있다. 애당초 너무나도 엉망진창인 대화의 기법이니까 비평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었다.

“겉 부분만 평가하는 건 평가라고 할 수 없겠지. 거기다 ‘시작은 반이다’라는 말은 있어도 끝이라는 말은 없어. 무엇보다도, 나는 네가 뭘 성대모사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곁 부분만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시작이 반 밖에 안 되는 건 평범한 사람이나 하는 소리야. 난 전혀 평범하지 않으니까. 내게 있어 시작은 곧 끝. 그리고 내가 뭘 성대모사 했는지 넌 미래에도 모를 거야.”

무엇이 그리도 자랑스러운 건지 녀석은 엣헴, 하고 가슴을 폈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옛날에 만났던 그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물론 자신이 평범함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자각한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스럽지만. 저렇게 자각해버려서야, 자의식 과잉이다. 물론 그건 내 개인적인 소견이고 녀석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면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녀석은 자신을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거겠지만. 그건 또 그 것 대로 문제다.

“너, 방금 조금 좀 그랬어.”

“어머,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오트슨 군, 셜록을 범인의 범주에 넣지 말게. 그건 셜록에 대한 크나큰 결례니까 말일세.”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가를 내릴 생각은 없다는 거지?”

“응!”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어라? … 미묘하게 데자뷰가 느껴졌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의문점을 느낄 필요도 없이 답변이 나왔다. 녀석과 대화하는 데 무어가 아무래도 안 좋을까.

“그럼 대체 우리 집에는 왜 온 거야?”

“소설을 읽으러 왔어.”

“그것 뿐?”

“그것 뿐.”

기운이 빠졌다.

“늘 그렇지만 너랑 있으면 빨리 지치는 것 같아.”

“그건 나도 동감. 하지만 재미있었어. 어제 이후로 이렇게 웃긴 적은 처음이야.”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날을 녀석은 아주 오랜 옛날처럼 말했다. 녀석의 등 뒤 창밖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흘끗 본 손목시계는 6시를 가리켰다. 오늘은 이걸로 끝내자.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희극을 관둔 것이다.

“슬슬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놀이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그걸로 끝. 서로의 암묵적인 약속.

녀석은 회색빛 코트의 매무새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마중…나갈까?”

“아니, 됐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멋대로 찾아온 손님인걸. 마중을 바랄 순 없지. 그럼 잘 있어. 내일봐.”

녀석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서 녀석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다, 이내 사라졌다.

집안은 방금 전 이곳이 굉장히 떠들썩했노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녀석이 사라진 집안은 방금 전 이곳이 굉장히 떠들썩했노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녀석이 누워 흐트러진 침대보와 어질러진 책상 위를 원래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녀석이 읽은 소설 공책을 침대 밑 상자에 넣었다. 대체 녀석은 이것을 어떻게 찾은 걸까. 궁금증을 느끼며 노트북을 켰다.

실컷 놀았으니 지금부터는 과제를 시작해야 했다. 과제하니, 녀석이 남기고 간 숙제가 떠올랐다. 여전히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뭐, 그런 것 쯤 과제가 끝나고 생각하자. 물론 과제를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다는 전제하지만.

새벽.

꿈을 꾸었다.

짙은 물안개가 핀 저녁의 익숙한 사거리. 나는 있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가만히, 오도카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녀석의 죽음을

두 눈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001

「점심 뭐 먹을 거야?」

옆 자리에서 하얀 종이가 종이만큼 하얀 손가락에 난파선마냥 떠밀려왔다. 한 시간 전부터 팔을 베고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녀석이 결국에는 점심거리를 정하며 시간을 때우기로 결정했나보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것은 금방에 썩 좋은 맛집이 없는 대학생에게 굉장한 고충거리다. 고등학교의 좋은 점을 대학교에 와서 깨닫는다는 옛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당시에는 거추장스러웠던 교복도 급식도 모두 지금에서는 그리울 뿐이다. 추억을 회상하는 건 딱 이정도가 좋다. 그만해야했다. 지금 고민할 건 녀석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할까? 이다.

떠오르는 건 없다. 애당초 점심을 뭘 먹을지 정하는 건 언제나 녀석이었다. 때로는 편의점에서 해결하기도 했고 때로는 근사한 밥집에 가기도 했으며 때로는 도시락을 싸오기 했다. 전부 다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부 다 좋지도 않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해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녀석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늘 그랬듯 판단을 유예했다.

「네가 결정해.」

공책의 가장자리 부분을 짧게 잘라 녀석에게 보냈다.

톡톡, 하고 녀석의 자리를 두어번 두들겼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 소리를 들은 녀석은 천천히 읽어났다. 창백한 얼굴. 아침부터 녀석의 컨디션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본인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녀석의 태도로 볼 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젯밤 무엇을 한 것일까. 대학생이 새벽에 할 만한 행동은 생각 외로 몇 되지 않는다. 끽해봤자 과제, 음주, ETC다.

첫 번째로 과제. 과제로 골머리 앓는 녀석은 상상되지 않는다. 녀석은 과제를 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골머리까지 앓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녀석의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과제가 무엇일지도 상상되지 않지만. 뭐 그런 이유를 제하고도 무엇보다 녀석은 오늘 과제가 없다.

두 번째로 음주. 녀석은 술을 먹지 않는다. 고로 패스.

세 번째로 ETC. 슬프게도 내가 경험한 것들에 한해서 대학생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기에 수많이 존재할 많은 가능성을 ETC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패스.

대체 무엇이 그리도 녀석을 피곤하게 한 것일까. 녀석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절대로 풀리지 않을 궁금증이다. 아쉽게도 나는 지금 녀석에게 물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은 수업시간이니까.

종이를 받고 읽은 녀석의 미간은 서서히 찌푸려졌다. 녀석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그것을 끝까지 무시하자 녀석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재미없었는지, 지쳤는지 어느 쪽이든 종이를 구겨버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썩 많은 선택지가 있지 않기에 녀석의 고민은 금방 끝났다. 녀석은 다시 구긴 종이를 펴 대충 찍찍 날려 썼다.

「도시락. 교내식당에 가는 거 귀찮아.」

교내 식당은 썩 멀지 않다. 그 거리조차도 귀찮다고 하는 녀석과 녀석이 원하는 게 도시락이라는 점을 미뤄보았을 때 녀석의 의도는 뻔하디 뻔했다. 녀석은 내게 도시락을 사오라고 하고 자신은 동아리 방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다. 평소라면 괘씸한 녀석이라며 일갈에 거부했겠지만, 오늘 녀석은 준환자다. 오늘만은 넘어가자.

나는 녀석이 보낸 쪽지에 간단하게 'OK' 두 글자를 써 보냈다.

그것을 본 녀석은 곧바로 쪽지를 손으로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다시 팔을 베고 누웠다. 생각 외로 점심 식사가 너무나도 빨리 결정되었을 것이다. 아마 녀석은 수업이 끝날 때 까지 이 상태일 것이다. 혹은 잠을 자던가. 따분한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녀석이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시간을 녀석과 놀아주는 데 쓸 수 없다. 당당하게 도강하고 있는 녀석과 달리 나는 이 수업을 신청하고 듣는 학생이니까.

녀석은 그대로 수업이 끝날 때 까지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것 마냥.

녀석이, 죽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녀석은 분명히 숨을 쉬고 있으니까.

“과제는 교탁위에 나두세요.”

괴상한 생각이 들려는 찰나, 교수가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새벽까지 작성한 과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교수님께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간단히 인사하며 지나치려고 했다.

“옆자리의 도강생은 어젯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러나 교수는 예상치 못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당당하게 도강하는 녀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넉넉한 풍채만큼이나 인자한 분이다. 그런 분이라도 수업 내내 엎어져 있는 학생을 보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가 봐요.”

“그런가? 아쉽군. 모처럼 완벽한 강의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확실히 오늘은 좀 더 졸렸다. 그 증거로 교탁을 향해 가야할 많은 여행객이 잠의 마력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과연 저들은 오늘 내로 과제를 제출할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이런 일 없도록 혼쭐을 내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어차피 듣는 사람은 몇 안 되니까. 하루쯤 한 명 줄어든다고 해서 별다른 감흥이 생길 리가 있나?”

말씀 소리가 커지신 것을 보면 이 말은 녀석을 향한 말이 아니라, 방금 전 간신히 넋을 바로잡은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어떤 방응이 좋을지 몰라 재차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짓자 교수는 넉살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럼 다음 수업 잘 듣게.’ 하고 나를 놓았다.

“그럼 과제는 이걸로 그만 받겠습니다.”

“아앗! 기다려주세요!”

교수는 그대로 교탁 위의 과제물 더미를 들고 밖으로 나갔고 몇몇의 학생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 파란속에서도 녀석은 깨지 않았다. 다음 수업도, 점심을 먹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다. 더욱이 깨어봤자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얇은 문고판 책은 단 한편의 소설과 그에 대한 평론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동백꽃> 중학교 시절 사투리의 난해함을 즐기며 읽었고 고등학교 시절 수능을 준비하며 재차 읽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는 걸 들고 왔다. 과연 대학교 시절에 읽으면 어떤 맛이 느껴질까, 궁금했다.

책은 술술 넘어갔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과연 그 냄새는 어떠한 냄새일까.

소설을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상상하곤 한다. 그 와중에 녀석이 깨어났다. 내 상상을 흩트린 주범의 눈에는 독기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끝났네?”

곤히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강의실은 조용했다.

“한 삼십분 정도 전에 끝났어.”

“어째서 깨우지 않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달려들 듯 말했다.

“너무도 곤히 자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젯밤 뭘 한 거야?”

“의자에서 팔을 베고 누워서 자는 쪽, 이불을 깔고 누워서 자는 쪽. 어느 쪽이 편하다고 생각해?”

내 질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곧장 자기 할 말만 했다. 이제는 내 질문을 무시하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익숙해 졌다. 슬픈 현실이다.

“당연히 후자겠지.”

답변이 불만족스러웠는지 녀석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폈다. 홍조보단, 울그락 불그락이 더 어울리는 수사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를 이런 곳에서 자게 내버려 둔거야?”

녀석은 한바탕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뒤편의 죽어 있던 학생들이 깨어났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녀석은 자신을 깨워서 동아리 방으로가 이부자리를 펴내고 그곳에 자신을 눕히길 원한 것이다. 녀석의 마음이 십분 이해갔다. 확실히 이곳에서 잠을 자느니 동아리 방에서 잠을 자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녀석의 말은 옳다.

다만, 녀석이 언제 내게 현명함을 바라던가? 오늘의 녀석은 이상했다. 보통의 녀석이라면 곱게 휘어진 눈매로 살짝 흘겨보며 장난스럽게 ‘감히 나를 이런 곳에서 재워? 흑흑, 많이 변했어!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라고 말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화내는 녀석은 이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백꽃을 가방 속에 넣은 다음 녀석의 가방까지 함께 들었다. 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를 무거운 가방이다. 그 가방을 억지로 짊어 맨 다음 나는 녀석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이끌었다. 녀석은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내며 소리쳤지만 건물 내에 있는 동아리 방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던 역효과만 날 것이 뻔했다.

동아리 방 문을 열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동아리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흘끗 뒤돌아보았을 때 녀석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했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곧장 신문지를 깔고 동아리방 구석의 침구세트를 정해진 자리에 폈다.

“솔직히 말해서 뭐가 그리 잘못인지 모르겠어. 네가 그토록 성내는 이유도 모르겠고. 일단 한숨자고 밥 먹고 이야기하자. 그러니까…”

살짝 뜸을 들였다. 이부자리를 펴기 전부터 말하기로 결심했지만 역시 집적 말하는 건 좀 그렇다. 하지만 오늘의 이상한 녀석이 내 마음을 뚫어볼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말해야했다.

“누워.”

눕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눕힐 생각이다. 제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육체적으로는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녀석이 운동선수를 목표로 삼아버리면 나는 질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운동을 싫어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나, 뭐래나.

“자. 점심 먹어야 할 때쯤에 깨워줄게.”

동아리 방 가운데 놓인 원탁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녀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녀석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말 그대로 중얼거림이라,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두 번은 말 안 하지롱.”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반응은 실로 녀석다웠다.

“잠이나 자셔.”

“안 그래도 잘 거야. 너무나도 피곤해…”

곧 새근새근, 녀석의 숨소리가 동아리방을 매워갔다.

숨소리에 맞춰 녀석의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그것의 반복.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잠자는 녀석은 마치 아기 같았다. 본인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화내겠지.

아마도 녀석은 어젯밤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고작 하룻밤을 새고 저리 이상해지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둘 중 하나다. 며칠을 연달아 새었거나, 어젯밤 녀석의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피곤한 일이 있었던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양쪽 다 가능성이 존재했다. 물론 녀석이 며칠 밤을 새는 이유 혹은 녀석을 피곤하게 만들 일이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혹, 원주율의 끝을 보고자 끊임없이 계산했을까? 뜬금없는 상상이었지만 녀석이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뭐 어느 쪽이던 그게 무엇이던 간에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 녀석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조용한 동아리 방.

이렇게 평화로운데도 불구하고 불현듯 다시 어젯밤의 꿈이 떠올랐다. 그 기분 나쁘고도 묘하게 현실감 넘치는 꿈. 단순한 개꿈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꺼림칙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개꿈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결단코 예지몽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예지몽 같은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반복을 통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없어지고 혼자가 되는 꿈도 꾼 적이 있다. 악마가 나오는 꿈도 꾼 적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예지몽의 일환 이라면 세상은 진즉에 멸망해버렸겠지.

철컥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동아리 방문을 열었다.

“누구 있…구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창용 형이었다. 까끌까끌한 머리에 방금 전 까지 농구를 하고 있었는지 농구 복을 입고 있는 형은 그야말로 스포츠맨이었다. 장난기가 좀 많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좋은 사람이 틀림없다. 그것을 증명하듯 형은 손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훈훈했던 안과 달리 밖은 찬 공기로 가득했다.

“쟤 어디 아프냐?”

창용 형은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녀석을 가리켰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잠을 안 잔 거 같은데…”

부정확했기에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예?”

“네 표정 너무나도 진지했어.”

그래요? 하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본다. 썩 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시침 떼는 연기만큼은 녀석 이외의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다 자부한다.

“뭐, 아님 말고.”

형은 잠시 말을 쉬었다 다시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농구 안 할래? 5:5하다가 한 놈이 나갔어.”

농구라면 싫어하지 않는다. 쌀쌀한 날씨에 하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십 분만 뛰면 금세 열기가 온 몸을 휘돈다. 평소라면 당연히 좋죠. 라고 뛰쳐나갔겠지만, 역시 오늘은 농구를 하기에는 녀석이 신경 쓰였다.

“녀석이 자고 있어서 조금, 그래요. 다음번에 불러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의 표정은 음흉하게 변해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장난기만 없다면 흠잡을 때 없는 좋은 형이었다.

그래, 장난기만 없다면.

“어머, 그래? 그렇구낭. 좋은 시간 가지렴.”

성인 남성이 고의적으로 발성하는 고음은, 단적으로 말해 역겨웠다. 음흉한 표정. 과연, 저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떤 종류의 상상이 이뤄지고 있을까.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야, 됐어 얘!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랬어. 아 정말로 좋은 한때였지.”

“됐어요. 아무렇게나 상상하세요. 아닌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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