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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결 사건 희생자 클럽
글쓴이: 모직물
작성일: 11-10-15 23:59 조회: 5,599 추천: 0 비추천: 0

0. 프롤로그.

자료 1) 에드워드 체스터필드(Edward Chesterfield)의 일기. 6월 3일부터 6월 5일자(부분)까지.

1896년 6월 4일 날씨 흐림

어제에 이어서 다행이 오늘도 희생자는 없다. 물론, 앞으로 2시간 남은 내일까지 아무 일도 없을 경우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시신을 창고에 넣어두는 작업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하물며 여동생이 네번째 시신이 될 뻔한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다음 네번째 희생자가 내가 된다면 그런 수고는 필요 없겠지.

이 그리피스 저택에 갇힌지 벌써 5일째다. 그동안 유령과 같이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살인범에게 죽은 사람이 세명이나 된다. 모두들 공포에 질려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실은 마찬가지다. 마리는 나더러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구나 하는 말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 자신은 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매일의 습관대로 또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증거다. 그러니까 무언가 잠시 현실에서 도피할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어제 에바가 독이 든 홍차를 마시고 사경을 헤메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후에는 분노한 나머지 반드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범인을 잡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 직후에 돌아온 것은 그저께와 마찬가지로 정체불명의 살인마에 대한 공포와 털끝만큼도 알 수 없는 사건의 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돋보기를 들고 크록포드씨가 죽은 방에서 혹여 실마리가 없을까 찾아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마리는 기대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함께 머리를 굴리고, 왓슨 역활을 자청하고는 있지만, 글쎄...

잠깐 머리를 식히고 다시 펜을 든다. 위에 쓴 글을 읽어보니 참 뭐가 뭔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다.

전날부터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꼭 보고서같이 사건의 자세한 경과를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나중에 이 저택에 찾아올 경찰을 위해 정황 보고서가 될지도...

1896년 6월 5일 날씨 맑음

만약 이 일기를 10분만 더 일찍 썼더라면 어제처럼 오늘도 희생자 없음, 이라고 보고할 뻔 했다. 그러나 펜을 들고 잠시 멍하니 창 바깥을 쳐다보는 동안 마리의 비명이 들려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미 6월 5일이 아니게 된 6월 6일 오전 2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상하게 피곤해져서 세세한 사항은 내일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제처럼 헛소리를 쓸 수 없으니까. 다만 집사 도일 씨가 당구실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는 사실만 간략하게 쓴다. 그리고, 이번에도 문이며 창이며 모두 잠궈놓은 방 안에서 홀연히 도일 씨를 죽이고 사라졌다는 것도. 또한 발 밑의 붉은 십자가도.

1896년 6월 6일 날씨 비옴

조금 후회된다. 어제는(정확히는 그때도 6월 6일이었지만) 제정신으로 오늘 자세하게 쓴다고 했는데, 차라리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쓰는 편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시체를 다시 창고에 눕혀놓은 후 일기만 쓰고 바로 곯아 떨어지자 아침 10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잤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실은 요 며칠간 제대로 잔 적이 없으니 당연하겠지. 그런데 덕분에 어제의 일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 일기를 쓰는 것은 오후 1시. 왜 이 시간대에 쓰는지 나도 모르겠다. 언제나 밤에 썼는데...게다가 무엇보다도 오늘도 사람이 죽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렇다면 역시 밤에 다시, 이 뒤에 덧붙여 써야겠다. 한심하지만.

밤 11시. 다시 위에서 이어 쓴다. 다행히 그 시간동안 죽은 사람은 없다. 남은 사람은 이제 5명. 언제 올 지 모르는 외부의 구원이 올 때 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문을 걸어 잠그고 창이며 문에 이것저것 쌓아놓아도 유령처럼 들어와서 목을 조르는 살인마한테? 마리는 이제 남은 방법은 모두 외부와 연락이 될 때까지 홀에 모여서 모두 함께 밤을 지새는 것 뿐이라고 했고, 나도 찬성이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거절했다. 그 이유로 이런저런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나는 안다.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지금 이 줄은 두번째 문단을 쓴 후 30분 후다. 갑자기 생각이 나는 게 있어서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솔직히 무슨 생각이었는지 정리가 안된다. 지금 생각나는 건 오로지 마지막에 떠오르는 게 에바의 인형인데. 왜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유령이 있을까?

아니, 지금까지 살인에서 모두 있었던 붉은 십자가가 피가 아닌게 사실인데...

근데 유령이 있을까? 있을리가 없는 건 확실한데...물론 이번 살인사건이 유령의 짓이라는 건 아니고.

다시 20분 후에 글을 쓴다. 위에서 쓴 글은 이미 지울 도리도 없어 내버려 두는 수밖에. 다시 봐도 왜 저따위 미친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살아남지 못해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웃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 네 명이 죽은 저택에 갇힌 상황에서 5일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웃어도 좋고.

그나저나 아까 생각했던 것들 중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그걸 가능하면 지금 가서 확인했으면 좋겠다. 이 시간에는 무리일까? 하지만 또 어제처럼 후회하느니 지금 가서 확인하는 게 좋겠다. 물론 사건과는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데 에바 말인데, 작년에 약속한

(이하의 내용이 이어질 것이라 추정되는 페이지는 백지 상태다. 나중에 일기를 발견한 당시 경찰의 견해에 따르면 페이지가 찢겨져 나간 흔적이 있으며, 이것은 범인이나 혹은 그 외의 타인에 의해서라고 추정된다. 또한 일기의 저자인 에드워드 체스터필드는 일기의 다음 날인 6월 7일에 사망하여, 6월 6일자의 일기가 그의 마지막 기록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자료 2) 타임즈(The Times)지 6월 11일자 기사.

<그리피스 저택, 6명 사망>

지난 10일, 엑세터(Exeter)의 경찰이 인근 주민들의 신고로 찾아간 윌링던(Willingdon)가문의 장원에 있는 그리피스 저택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발표하였다. 살인사건의 희생자는 저택의 주인이자 작년 타계한 전직 의원인 윌링던 백작 케네스 경의 추모를 위해 모였던 9명의 친인척들 중 6명이었다. 희생자는 고 케네스 경의 정당 동료이자 친구였던 다니엘 크록포드(Daniel Crockford), 케네스 경의 손자들인 윌리엄 체스터필드(William Chesterfield), 세실 체스터필드(Cecil Chesterfield), 저택 집사 네드 도일(Ned Doyle), 또 다른 손자 에드워드 체스터필드(Edward Chesterfield), 손녀인 에반제린 체스터필드(Evangeline Chesterfield)이다.(사건 순 나열) 이 중 앞의 네명은 교살 시체로 창고에서 발견되었으며, 에드워드 체스터필드의 경우에는 독살, 그리고 에반제린 체스터필드는 살인이 아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저택의 생존자 중 하나인 주치의 존 그레이브스(John Graves)가 증언하였다. 생존자는 그레이브스 씨를 포함한 에드워드 체스터필드의 약혼녀 마리 르 블루아(Marie Le Blois), 도라 크로프트(Dora Croft)다. 경찰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옮기고,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정황을 조사함과 동시에 범인의 색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B2면에서>

Chapter 1. 유령과 이방인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경솔한 발언을 진심으로 후회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저는 유령이 이 세상에 없다고 믿었을까요.

"흐흥...이 녀석이?"

눈앞의 '존재'가 나를 거만하게 바라보며(키 차이가 커서 올려다본 통에 별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한다. 그 눈매는 그야말로 아랫사람을, 아니, 그 이하의 하인이나 노예쯤으로 보는 눈이다.

검은 색의 드레스, 어두운 금발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양 어깨에 늘어져 있다. 백자 자기같은 피부에 커다란 파란 눈은 정말 귀엽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눈 앞에 있는 서양 소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람인데. 아니,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똑똑해보이지 않는데? 정말 확실해?"

"그 분께서 추천하셨지 않습니까. 확실할 겁니다. 아마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려는 마냥, 옆의 '집사'께서 태연하게 말한다. 이 양반도 보이는 건가? 아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저 존재를 믿고 있어. 아니다. 믿는 정도도 아니다. 마치 옆자리 친구하고 '오늘 한일전은 어떻게 됐어?'라고 말하는 정도로 대화하고 있어.

이건 꿈이다, 틀림없이. 아찔할 정도로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외에는 이 상황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다. 아닌게 아니라 무대조차 뭔가 이 세상하고는 동떨어져 있잖아?

영국. 엑세트(Exeter)주 서부 해안. 지은지 1백여년이 넘었다는 저택.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집사.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봤던 그림같은 메이드. 그리고 눈 앞에...

"이 중국인이? 흥...우리 대영제국한테 전쟁에서도 졌다는 미개한 사람들이잖아? 그런 사람들이 이런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어?"

눈앞에서 소년을 쏘아보던 '소녀'가 들고있던 양산 끝을 이쪽에 향한다. 그러니까 난 중국인이 아니라니까! 한국인이야! 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발언은 삼가했다.

"혹시 모르지요. 동양의 신비를 발휘해서...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이 양반이 알면서도! 그런 항의도 마음속으로만 했다. 소년, 지금 눈앞의 어떤 기괴한 일보다 더 기괴한 상황을 설명할수만 있다면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소년은 그리피스 저택의 광대한, 그러나 낡고 으스스한 복도에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소녀'는 잠시 '집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유리 세공품처럼 섬세한 이목구비로 이루어진 얼굴을 찡그린다.

"너, 어디 가!"

그렇게 외치며 소녀가 날아왔다. 소년의 코 앞으로.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잘못 본 것도 아니다. 정말 날아왔다. 발 끝이 공중에서 10cm쯤 떠서. 드레스만 풍성할 뿐 작고 아담한 체구에, 키도 소년의 턱끝에 미칠 정도의 체구라도 그 정도로 가벼울 리도 없는데.

"내 얘기는 아직 안 끝났어. 감히 체스터필드 가문의 영애께서 말씀하시는데! 그게 중국인의 예의야?"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니까!

꼴사납지만 차라리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싶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이 말도 안되는 저택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방학동안 잘 자리가 없는거 알 게 뭐냐. 아무튼 이 자리만 벗어나면 된다. 애당초, 현재 시간이 2011년인것만 빼면 암만 봐도 19세기 영국의 저택과 그 주인이라는 데에 조금도 위화감이 없는 이 자리에서, 나만 어색하잖아? 그러니까 얌전히 퇴장해야지.

허나, 상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거기다 그 이상한 자리에 끼워넣으려는 정도가 아니라 어처구니 없는 배역까지 맡기려 한다.

"흥...! 정말 한심하네. 하지만...좋아, 그런거야 아무래도. 누구든 사건을 해결해주면 되니까."

검은 드레스 자락 한쪽을 우아하게 움켜쥐으며, 소년이 2차원 3차원을 통틀어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쁜 소녀가 선언하였다.

"너, 백 년쯤 전에 내가 죽었던 살인사건의 범인과 진상을 밝혀."

조금도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태도와 어조로, 눈앞의 '유령'께서는 한국에서 온 소년, 한세현에게 명령하였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절실히, 다시 한 번 외쳤다.

신이시여,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왜 그런 짓들을 했을까요.

제가 왜 유령따위는 없다고 믿었을까요.

그리고 유령을 믿는, 아니면 유령 이야기를 최소한 즐기려는 사람들을 왜 그렇게 괴롭혔을까요.

약 2주 전.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켜 놓은 촛불이 어슴프레 빛난다. 그 촛불을 둘러싸고 있는 예닐곱명의 창백한 얼굴들을 비추며. 교실 바깥에 스산한 바람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돛우며, 유령 이야기를 위해 모인 학생들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방에 뭐가 있었는 지 알아?"

"뭔데?"

낭랑한 '영국식' 영어가 묻는 말에 소심한듯한 여학생의 낮은 목소리가 되물었다.

"관이야, 관."

분위기를 탈 목적이었을까. 그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하던 여학생이 잠시 말을 끊었다. 물론 그 정도의 반전으로는 비명 소리 하나 끌어낼 리가 없다. 이야기하는 소녀도 기대하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니까.

"이상하잖아? 좀 전까지 자기가 자고 있던 방에, 관이라니. 남자는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관을 열려고 손을 대는 순간, 들려오는 소리가..."

[띠리리리-!]

일제히 공기가 흐트러졌다. 깜짝 놀라 낮게 비명을 지른 여학생도 있다. 첫 울림에는 그랬다. 그러나 휴대폰 소리가 두번, 세번 울리자 모두가 맥이 풀린 표정을 지으며 발신원을, 정확히 말하면 발신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 여보세요."

불도 켜놓지 않은 교실 한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남학생 한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을 들고 말한다.

"아? 응. 있어. 응...그 '새 폴더'라고 써 있는 데에. 지우면 죽는다? 응. 맞아. 그거. 그래. 맥스한테는 줬고...아무튼..."

한 3분 동안 통화하던 소년이 그제서야 집중되는 시선을 눈치챈 듯 촛불을 둘러싸고 모여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짐짓 휴대폰을 얼굴에서 조금 떼 놓는다.

"왜? 뭘 봐?"

허탈한 분위기 따위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태연히, 그리고 퉁명스럽게 그쪽을 향해 내뱉었다. 모인 여학생들의 시선이 험악해졌지만 남학생은 모른 척 했다. 즉 상황과 분위기를 알고도 일부러 훼방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휴대폰 통화를 재개했다.

"응. 응. 그래. 아, 그것도 보내줘. 그거...어디? 어디 사이트? 아...주소좀 불러봐. 쓸 게 어디있나..."

그리고 또 한참 통화를 해댄다.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는 다른 학생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그리고 또 3분.

"아, 그래. 끊자."

기어이 끊냐, 라고 영국의 고등학생들이 생각하려던 순간.

"아, 잠깐, 잠깐."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대는 동창생을 보고 모두가 신음 소리를 낸다.

"아, 피자 시켜놔. 반만 먹어. 그럼."

그리고 기어이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소년이 본 광경은 한층 더 으스스해지고 험악해진, 그러나 유령 때문은 아닌 교실의 분위기였다.

"왜? 계속 해. 분위기 깨졌냐?"

그런데 뻔뻔하게도 사과 한마디 없이 이런 소리나 하지 않는가. 모두가 적의에 찬 시선을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학생에게 날렸다. 특히 이야기를 하던 소녀는 거울을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혈압이 오르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오히려 고소하다는 듯 바라보는 소년이 급기야는 이렇게 말했다.

"유령이 정말 있으면 휴대폰이 울리든 팡파레가 울리든 나올 거 아냐?"

히죽거리며. 우직, 소리와 함께, 소녀의 손에 든 거울에 거미줄같은 금이 갔다.

"휴대폰 꺼 놓고 입 다물라고 했잖아! 한, 세, 현!"

그리고 소녀는 거울을 전력을 다 해서 영국에 유학 온 한국의 소년에게 집어던졌다.

"정말, 일껏 분위기 좋았는데."

좀 전까지 유령 이야기로 학생들의 아드레날린을 한껏 부풀게 했던 여학생, 아네트 라손 양이 투덜댄다. 그 '좋은 분위기'를 멋지게 훼방놓은 남학생, 한세현 군은 보이지 않게 실실 웃으면서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다시 원래대로 해 놓는다.

밤 11시. 런던 근교의 베닝슨 공립학교의 교실 하나에서 벌어진 담력 시험.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로 흐지부지 끝나고, 행사를 주도했던 두 남녀학생은 물론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참고로 오늘은 2011년 5월 1일이다.

"너,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랬지? 응?"

들고가던 의자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긴 은발이 휘날리도록 휙 돌아서며 여학생이 이쪽을 노려본다.

"전혀. 실수였어. 미안."

고의성이 돋보이는 국어책 읽기였다.

은발의 여학생은 불쾌한 눈으로 이쪽을 한동안 쏘아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물론 믿을 리가 없다. 한 두번 그런 게 아니니까. 반쯤 포기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싫다. 무조건 싫다. 유령 이야기든, 심령 어쩌구든. 그런 종류는 모조리 싫다. 무서워서 싫은 게 아니다.

"기껏 너까지 불렀는데..."

"응?"

자그마한 등 뒤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서로 이야기는 끝,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책상까지 원래 교실 배치대로 완전히 두고, 아네트는 허리에 양 손을 짚고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 여학생은 정말 예뻤다. 아닌게아니라 이 학교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재색겸비의 학생회장인 것이다. 다만 우등생답게 잔소리가 심해,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히 엇나가있는 외국의 유학생, 한 모군에게는 병충의 살충제와 같은 존재다.

"너, 방학 동안에는 어떻게 할거야? 기숙사는 문 닫고."

"아아, 그거...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무슨 그리피스 저택인가에 가서 방학 동안 머무라고 했는데..."

<이하 내용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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