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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카이저 피닉스의 상담
글쓴이: 온점
작성일: 11-09-17 21:44 조회: 4,025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비둘기와의 조우~


찬장에서 완전히 눅눅해진 사브레를 발견했다.
“우와. 이거 언제 뜯었던 거지….”
다행히 아직 곰팡이는 피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기에는 거부감이 든다. 이미 질감도 사브레의 바삭바삭한 그것이 아니라 조금 단단한 빵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고. 아무튼 이래서야 먹는 건 무리다. 재수 없으면 탈이 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싱크대에서 투명한 비닐봉투를 꺼내 눅눅해진 사브레들을 담고 상자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남은 건 이 비닐봉투에 옮긴 사브레.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뒀다간 개미가 엄청 꼬일 것이 분명하다. 이건 어떡하는 게 좋을까.
약간의 고민 끝에 어차피 할 짓도 없으니 이건 공원의 새들에게 먹이로 주기로 했다. 집 밖으로 안 나간지도 꽤 오래 지났다. 계속 집에만 박혀있으면 분명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나는 집에서 계속 입고 있던 고등학교 체육복 차림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적당히 흐린 가을날의 공원은 바람도 선선하고 꽤 상쾌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비둘기들에게 사브레를 부숴서 모이로 던져줬다.
“비둘기야 먹자~ 구구구구구.”
평일 2시의 공원에는 아무도 없기에 난 당당하게 이런 소리를 하며 모이를 줄 수 있었다. 다들 이 시간에는 학교나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한가한 사람은 전업주부, 백수나 초등학생까지의 어린애뿐이겠지.
나는 전업주부도 초등학생도 아니다.
“거, 참 한심하기도 하네.”
끌끌 웃으며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계속해서 모이를 주었다. 뒤뚱거리며 모이를 먹는 뒤룩뒤룩 살찐 비둘기들에게선 조류의 날렵함보단 시궁쥐 같은 느낌이 났다. 세간에는 이런 비둘기들을 닭둘기라고 부르던가. 꽤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눅눅해진 사브레를 전부 비둘기들에게 주고 난 뒤 나는 다시 집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공원에서 2분 정도 걸었을까, 뒤에 느껴지는 묘한 기척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자그마한 회색 비둘기가 내 뒤를 총총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뒤뚱뒤뚱이 아닌 총총이다. 좀 전의 닭둘기들과는 다른 슬림한 몸매를 가진 비둘기다운 비둘기였다.
“음. 미안하지만 이제 사브레는 없어. 따라와도 뭐 안 나온다?”
비둘기가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지금껏 날 따라왔다는 게 왠지 기특하게 느껴져, 난 웃으며 비둘기에게 말을 건넸다.
“딱히 사브레가 먹고 싶은 건 아니라네. 옛날부터 자네에게 꽤 신경 쓰여서 말이지.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가? 그렇게 있으면 있는 복도 나가는 법이라네.”
비둘기가 대답했다. 생각 외로 약간 허스키한 좋은 목소리였다.
…응? 아니, 잠깐, 왜 대답해. 뭐야 이게. 어. 잠깐만. 어?!
“소개가 늦었군. 나는 전설의 비둘기 카이저 피닉스라고 한다. 전부터 자주 먹이를 주는 자네를 눈여겨왔다네. 항상 어딘가 우울해보이기도 했고 말이지.”
비, 비둘기 주제에 카이저니 피닉스니 붙이지 마. 아니, 비둘기 주제에 말하지 마.
“힘든 일이 있다면 한번 나와 상담해보지 않겠나? 평화의 상징으로써 최선을 다해 상담에 응해주도록 하지. 이래봬도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몸,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무엇보다 내 상담은 보통의 상담과는 전혀 다르고 말이지.”
고졸과 동시에 백수가 되어 허송세월을 보내던 난 지금 비둘기에게 걱정을 받고 있다.
이제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챕터 1 ~닭둘기 원더랜드~



인간으로써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약간 울어버리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둘기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소리는 필히 환청이겠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나의 정신세계는 어떤 원더랜드가 되어버린 것일까. 몰라. 이제 지쳤어. 어서 집에 가서 잘래. 자면 괜찮아질 거야. 푹 자고 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조금 비틀거리며 집을 향해 텅 빈 골목을 걸었다.
“자네, 내가 비둘기라고 하여서 무시하는가? 인간제일주의라는 것이야?”
그리고 비둘기는 그런 나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었다. 빨빨거리며 쉬지 않고 뒤쫓았다. 비둘기에게 스토킹당하는 경험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는데 당해보니 역시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나저나 쥐도 오리도 개도 아니고 왜 하필 비둘기야. 내 정신세계 이해 못 하겠어.
“이봐! 보자보자하니 너무하지 않은가! 평화의 상징을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게 사과, 아니 UN에게 사과하게나!”
“회, 회색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야! 하얀색 비둘기만이 평화의 상징이라고! 회색 비둘기 따위 그냥 해조야!”
참다못한 난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하지만 비둘기에게 화내고 말았다. 지나가는 아줌마가 깜짝 놀라더니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지나갔다.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렇게 멋지게 자폭한 나와 달리 비둘기는 우습다는 듯이 구- 하고 울더니


뿍!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의 털이 후드득 뽑혀서 맨살이 되었다.
그리고 직후 부왘! 하고 새하얀 털이 자라났다.


“나는 전설의 비둘기 카이저 피닉스, 전 세계의 비둘기의 영혼과도 다름없지. 하얀색이 좋다면 못 바꿀 것도 없다네. 이제 만족하겠나? 제대로 평화의 상징이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는 하얀 비둘기. 방금 전에 일어난 너무나도 초현실적인 광경에 난 선 채로 굳어버렸다. 부리로 털을 다듬으며 구구거리는 비둘기에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혹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그, 그럼 너 설마, 사람 모양으로도 변하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인간의 모습은 불편하다만… 뭐 어쩔 수 없지. 정말 귀찮게 하는구먼.”
내 말에 하얀 비둘기는 투덜거리며 꿈틀꿈틀 밀가루 반죽처럼 꾸물거리더니 점점 커져서 이윽고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회색 비둘기를 베이스로 잡은 듯한 조금 부스스한 회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새침하게 생긴 나신의 미소녀가 내 앞에서 있었다. 나이는 14살 정도일까. 새하얀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고 자그마한 가슴과 가느다란 다리는 가련한 분위기를 자아내 평범한 사람도 당장 소아성애자로 만들어버릴 법한 포스를 뿜어냈고 연상의 돈 많은 여자 취향이던 나도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
“환청뿐만 아니라 환각도 보이잖아아아아아아!!!!!!”
지만 그보다 큰 절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져 좌절했다. 틀렸어 이제 난 당장 정신병동에 입원당해도 이상할 게 없어졌잖아 내가 정신병자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에, 에, 에취! 역시 털이 없다는 건 꽤 춥구먼. 후우.”
그 와중에 여전히 허스키한 목소리의 비둘기가 기침을 했다. 그걸 또 순간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는 이런 환상을 보고 싶었던 거야? 어린애의 알몸을 보고 싶었던 거야…?


인간으로 변한 비둘기의 화신 카이저 뭐시기는 알몸인 채로 여전히 나를 따라왔다. 나는 비둘기의 뭐냐, 아무튼 비둘기녀를 무시하고 평소보다 1.8배 빠른 속도로 걸으며 집을 향해 움직였다. 비둘기 모습이었을 때에도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인간으로 변하니 백억 배는 더 신경 쓰인다. 우와, 등에 식은땀 나고 있어.
사실 그래봤자 환상이니까 나 이외의 사람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애당초 이 시간의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고. 그래도 영 찝찝하니 어서 집으로 가자.
“에, 에에취! 에취! 추, 춥군. 역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구먼. 뭔가 걸치고 싶은데….”
비둘기녀가 재채기를 하며 넌지시 말했지만 난 무시하고 더욱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비둘기녀는 우는 소리를 내며 길지 않은 다리로 거의 뛰듯이 내 뒤를 쫓아왔다. 조금 미안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나는 파출소 앞에서 이전에 도움을 받았던 경찰관 아저씨를 만나서 인사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경찰관 아저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가방에서 수갑을 꺼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지 않았어야 했는데. 눈치 채고 재빨리 뛰었어야 했는데.
“이….”
고고고고고. 친숙한 이미지의 경찰관 아저씨에게서 살의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멸살. 모 격투게임의 권의 극에 달한 자와도 같은 오오라.
“아동성범죄자 자식아!!”
“나, 남들한테도 보이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고 도망쳤다. 잡히면 죽는다. 순옥살 당한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권의 극에 달한 경찰관의 속도는 T-80만큼이나 빨랐고 나는 서서히 인조인간 경찰관과 점점 가까워져갔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데스. 바람의 윈드.
그렇게 이제 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한 순간- 비둘기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비둘기녀의 등에 회색 날개가 돋아나서, 그렇게 날아서, 아무튼 하늘 높이 날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화악 날았다. 행글라이더를 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느낌으로 날았다.
“이게….”
나는 멀어져가는 땅과 우오오오 부르짖는 경찰관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외쳤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


아무래도 비둘기녀는 정말 실존했던 것 같다.
“환상이라니,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나는 엄연히 실존하네만.”
하늘로 날아올라 경찰관을 따돌리고 어떻게든 돌아온 내 자취방.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앉은 비둘기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어이가 없어져 허허 웃었다.
비둘기녀의 간략한 설명으로 따르면 자신은 무지 오래 산 전설의 비둘기 비슷한 것으로, 아무튼 구미호가 천년 살면 인간으로 둔갑을 하듯이 비둘기도 그렇게 되어서 뭐 그렇다고 한다. 뭔가 좀 그럴듯한 이야기였지만 슬프게도 내 뇌는 이 정도만 이해했다.
“아아. 아무튼 이 이불이라는 건 엄청 좋고 따뜻하고 부드럽군. 후우….”
데굴데굴. 비둘기녀는 이불 안이 상당히 기분 좋은지 구- 구- 소리를 내며 꿈틀꿈틀 몸을 움직였다. 구구거리는 걸로 봐서 비둘기이긴 한가보다. 근데 저 이불 오래 안 빨았는데.
“실존한다면 실존한다고 말해주란 말이야…. 알았으면 재킷이라도 빌려줬을 텐데.”
“아니, 상대방을 바로 앞에 두고 존재론을 따지는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닌가? 거 참.”
“그, 그건 그렇다 치고! 비둘기에게 상식을 바라는 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알몸으로 돌아다니면 부끄럽지 않은 거야? 비둘기라면 몰라도 인간의 모습으론 좀 그렇지 않아?”
“보면서 잔뜩 세워놓곤 너무하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참았건만.”
크윽, 말문이 막힌다. 솔직히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정말 그냥 환각 같은 걸로 생각했을 뿐이다. 난 결코 여자애를 알몸으로 걸어 다니게 할 변태가 아니다!
“그나저나 기껏 인간의 모습으로 날면서까지 구해줬다만 고맙다는 말도 없는가? 요즘 신세대들은 다 이렇단 말인가. 동방예의지국도 이제 다 옛말이야.”
좋게 봐줘도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런 소리를 하니 참 묘하다. 일단 감사해주는 게 좋겠지. 실제로 고맙기도 하고. 만일 이 비둘기녀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당시 이 비둘기녀 때문에 경찰의 표적이 된 거잖아. 어?
…뭔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지만 생각하기 귀찮아져서 그냥 감사하기로 했다.
“아, 응.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흠. 알면 됐다. 항상 고마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도록.”
훈훈한 가르침 끝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비둘기녀는 이불을 둘둘 만 채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바닥에 멍하니 정좌해있었다. 이야. 단번에 어색해졌다.
“그건 그렇고, 비둘기의 화신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타난 거야…?”
“응? 그건 이미 말했지 않았는가? 매일 공원에서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는 게 영 보기 그래서 말이다. 난 인간은 아니지만 도와주고 싶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네. 내 능력이라면 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말이지.”
내가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모습은 비둘기의 동정을 살 수 있을 만큼 우울하고 불쌍해 보였던 걸까. 솔직히 엄청 상처받았다. 비둘기에게 동정을 받았어. 비둘기.
“그리고 널 보고 있자니 현세대의 비둘기들이 투영되어서 말이다.”
“혀, 현세대의 비둘기…?”
“그래. 날개가 있는 주제에 날아다니지도 않고 사람이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와 음식물 쓰레기만 주워 먹고 사는 닭 같은 녀석들 말이다. 조류로써의 자존심이 있지 날개를 두고 뭣들 하는 건지. 대충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 그 태도가 참 화나지 않는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동의를 구하는 비둘기녀. 음, 그런데 난 그런 비둘기와 동족 취급받은 거지? 나에게서 닭둘기의 모습이 투영된다는 소리를 들은 거지…?
“너, 너도 빵 같은 거 던져주면 먹을 거 아냐. 그리고 경찰이 나타나기 전까진 너도 안 날고 걸어서 따라왔었잖아! 우습게보지 마!”
자신도 모르게 닭둘기를 옹호하는 내가 여기에 있었다.
“그야 내가 날아버리면 너를 한참 앞지르게 되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그리고 던져주면 먹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연명하진 않아. 난 쓰레기 따위엔 손도 대지 않아! 나는 조류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네!”
벌떡.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비둘기녀. 이불이 자연스레 스르륵 흘러내려 다시 알몸이 서서히 드러났다. 솜털조차 나지 않은 비둘기가 변한 거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피부와 작지만 봉긋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과 가느다란 쇄골이 너무나도 흥분
“오, 옷 입어! 옷!”
되었지만 나는 여성에 면역이 없는 겁쟁이. 환상이라고 생각했을 땐 야동 같은 느낌으로 당당히 쳐다봤지만 실존하는 것이라고 알게 되니 정신력이 한계여서 결국 난 남자답지 않게 널어둔 빨래에서 아무거나 잡아서 비둘기녀에게 던져주었다. 아쉽지만 이게 내 분수에 맞아. 그리고 들려오는 고맙다는 소리와 부스럭부스럭 옷 입는 소리. 쓸데없이 상상력이 자극되어 심란하다.
“자, 다 입었다! 이걸 교복이라고 부르는 물건이던가? 학생들이 입는 걸 보고 내심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이라 입게 되니 조금 기쁘군. 좀 많이 크긴 하지만 말이다.”
몰랐는데 내가 던져준 옷은 졸업식 이후 방치해둔 교복이었던 듯 했다.
그리고 이제 다 입었겠지 하고 돌아본 곳에는 벗고 있을 때보다 에로틱한 무언가가 있었다.
비둘기녀에겐 너무나 컸던 내 교복 셔츠는 무릎의 조금 위쪽까지 내려와 있었고 소매 또한 길어서 덜렁거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비둘기녀의 자그마한 체구와 가련함이 더욱 돋보였고 작은 소녀에게 남고의 교복 셔츠라는 언밸런스함이 불타올라서, 거기에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쳤기에 애매하게 살색이 비칠락 말락 하고 풀려있는 맨 위쪽의 단추 사이로 비치는 새하얀 목과 앙증맞은 쇄골이 너무나도 불끈불끈해서!
이, 이건 알몸보다 흉악해!!
“…오, 아, 아래쪽이 또 엄청 볼록해졌구먼. 조금 무서울 정도인데.”
“아, 으으, 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으며 불끈해진 아래쪽을 숨겼다. 비둘기녀는 그런 나를 보며 뭐가 즐거운지 쿠쿠 웃는다. 그게 또 쓸데없이 매력적이라 어째선지 화까지 조금 났다. 비둘기 주제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이러면 나 비둘기에게 성욕을 느끼는 변태가, 아아….
“그나저나 배가 고픈데, 뭐 먹을 것은 없나? 좀 전에 인간의 모습으로 날았더니 엄청나게 배가 고프다. 음, 좋아! 먹을 걸 조금 얻어먹은 뒤에 네 상담을 들어주도록 하지. 나는 보기보다 바쁜 사람이라네. 아니, 바쁜 비둘기인가?”
약간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하는 비둘기녀. 순간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드센 아이는 귀엽구나. 비둘기이긴 하지만.
“알았어, 알았어. 그럼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비둘기, 라면 좋아했지? 국물도 그렇고.”
“그게 무슨 소리냐? 비둘기인 나도 금시초문이다. 음, 나는 그, 전에 내가 공원에서 뿌려줬던 사브레가 조금 먹고 싶다만. 흠흠.”
비둘기녀가 방금 전과는 다른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내가 공원에서 뿌려줬던 건 방금 전처럼 눅눅해진 거나 찬장에 넣어놓고 깜빡해서 날짜가 지난 물건이었지만. 참고로 사브레는 부모님이 오실 때마다 몇 통씩 사오기 때문에 항상 집에 상비되어 있는 음식 중 하나다. 우리집은 쌀은 없어도 사브레는 있다.
“다른 아이들이 친구랑 놀기 바쁠 때 혼자 공원에 와서 사브레를 나눠주며 비둘기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는 그 헌신적인 모습은 꽤 멋있었다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지.”
…그냥 친구가 없어서 그러면서 놀았다는 건 말하지 말자. 비둘기녀의 순수하게 칭찬하는 듯한 미소가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와삭와삭, 오독오독.
나와 비둘기녀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놓고 앉아서 사브레를 먹었다. 달콤하고 바삭한 사브레가 혀에 감칠맛 나게 달라붙는다, 라고 거창하게 묘사해봤지만 워낙 자주 먹은지라 사실 별 생각 안 든다. 약간 질려버린 나와는 달리 비둘기녀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행복한 표정으로 사브레를 조금씩 오독오독 뜯어먹었다.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있자니 그간 쌓여있던 마음의 암흑이 걷어지는 기분이 든다. 대신 로리타 콤플렉스에 눈을 뜰 것 같아서 조금 무섭지만.
“맛있냐?”
“음, 맛있다네! 굉장히 사치스러운 기분이야! 이렇게 큰 걸 혼자서 먹다니!”
이렇게 기뻐하니 참 뿌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사브레를 먹던 비둘기녀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읏, 하고 약간 얼굴을 붉히며 먹는 것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 목 막혀? 마실 거 갖다 줄까?”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단지 순간 조류로써 부끄러운 생각을 해버려서 말이네, 그게….”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는 비둘기녀.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모습이니까 딱히 조류로써의 자존심 같은 건 상관없는 게 아닐까? 그 부끄러운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의견을 비둘기녀에게 말했다.
“그, 그런가? 그렇다면, 비,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뭐 비둘기도 비둘기 나름의 신념 같은 게 있을 테니까, 결코 비웃지 않을게.”
“…좋아. 알겠다. 만일 비웃는다면 네 거기를 쪼아버릴 테니까 조심하도록.”
갑자기 엄청 듣고 싶지 않아졌지만 비둘기녀는 우물쭈물하며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조류로써의 자존심에 관련된 거라면 어떤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머, 먹여줬으면 한다! 공원에서 했던 것처럼, 그, 그렇게!”
아아. 그거였나. 그럼 내가 잘게 부슨 사브레를 바닥에 뿌리면 비둘기녀가 몸을 숙이고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흩뿌려진 사브레를 입만을 사용해서 먹는…
“그그그게 무슨 변태 플레이야?! 완전 변태잖아! 엄청 변태잖아!!”
“비, 비웃다니! 안 비웃는다고 해놓고선! 다, 당장 바지를 벗어! 마구 쪼아주마!!”
“사람 모습으로 그래봤자 기분 좋기밖에 더 하겠냐! 자, 잠깐! 벗기지 마!”
직후 굉장한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결론만 말하자면, 비둘기녀가 말한 것은 바닥에 뿌리는 게 아니라 손 위에 사브레를 올려놓고 먹기를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생각하면 여전히 변태 같긴 하지만 바닥에 음식을 뿌리고 먹으라고 하는 귀축보다야 훨씬 낫다.
그런고로 팬티 차림의 나는 손 위에 잘게 부순 사브레를 올려놓고 있었고, 비둘기녀는 망설이며 고양이 같은 자세로 내 앞에서 흠칫흠칫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마, 말하게나.”
“어, 뭘…?”
“펴, 평소에 비둘기에게 줄 때 하는 대사 말이다! 이 바보 포경아!”
포경이라니 말이 심하다. 애초당시 결국 너 못 봤잖아. 그건 그렇고 매도당하면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버린 나란 존재에 조금 상심해버렸다.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 것인가….
“비, 비둘기야 먹자~”
번뇌를 가라앉히고 평소 비둘기 밥 줄 때 했던 말을 하는 나. 비둘기녀는 그 말에 움찔하고 반응하더니 살금살금 걸어와서 내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갔다.
“으읏~?!”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비둘기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내 손의 사브레를 먹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곧 느껴지는 따뜻하고 축축한 혀의 감촉이 너무 최고라서 온 몸에 전율이 마구 일었다. 나 손이 성감대?!
아, 안 돼! 가, 가버리고 싶지 않아! 읏, 으읏, 차, 참아야만 한다!
“읏, 앗, 흣, 흐읍, 후우, 하, 하아, 마, 맛있어…?”
이대로라면 버틸 수가 없다는 생각에 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물었다. 왠지 묻고 나니 엄청 이상한 뉘앙스가 되어버려서 민망하다.
내가 질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둘기녀는 내 손의 사브레를 모두 먹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마시쪙… 아, 아니! 맛있구먼! 응. 그, 나, 나쁘지 않아!”
“아, 아. 다행이네, 후우. 아, 정말….”
“그, 그리고 난 비둘기 말고 카이저 피닉스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부른다면 그것으로 불러줬으면 하네. 일단 동료들도 전부 날 그렇게 부르네만….”
피죤투라면 몰라도 피닉스는 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 전율이 덜 가셔서 부정할 기운이 없다. 그리고 감도는 어색한 침묵.
나는 침으로 끈적이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수많은 번뇌를 느꼈다. 비둘기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계속되는 대치상태. 참다못한 내가 화장실에서 손 씻고 오겠다고 말하려 한 순간 비둘기녀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음, 흠, 에헴, 그, 그렇다면 지금부터 상담을 시작하겠네! 아무튼! 기, 기대하시게나! 내 상담은, 엄청 굉장하고 대단하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대체 뭐가 어떤 상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런가. 현 세대의 비둘기와 판박이구먼.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내가 자신의 상황과 고민을 간단이 요약해서 이야기하자 피닉스… 비둘기녀가 역시 그랬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째선지 굉장히 상처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간단히 설명하자면 1년 전 고3 시절의 나는 수시도 수능도 여기저기 찔러보고 난리를 피웠지만 멋지게 전부 탈락했고, 지금은 재수준비를 한답시고 고등학생 때부터 지내왔던 자취방에서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으며 생활하는 중이다.
물론 재수준비라고 했지만 딱히 의욕이 없기에 가을이 되도록 거의 아무것도 안 했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아니다. 생활비는 부모님이 꾸준히 부쳐주고 딱히 돈 쓸 일도 없으니까. 거의 매일매일 방에서 뒹굴 거리고 산책하기의 반복.
간단히 요약하면, 고졸 이후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두려웠다.
“뭐,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네. 그나마 그건 비둘기보다 잘나지 않았는가?”
비둘기보다 좀 나은 놈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인간으로써 기뻐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자네는 왜 요즘의 비둘기가 그렇게 되었는지 아는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묻는 비둘기녀.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답했다.
“도시에선 먹을 게 넘쳐나니까,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서가 아닐까?”
“그래. 그런 것이지. 네게는 아마 부모님이 그런 존재일 것이야. 그러니까”
비둘기녀가 팔짱을 끼고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냉큼 의절 당하게나!”
“싫다!”
나도 그에 맞춰 전력으로 거절해주었다. 의절이라니 뭐야 그 극단적인 선택은.
“음, 그렇다면 그냥 전화로 이제 생활비를 끊어달라고 하는 것은 어떤가?”
“아니, 왜 내가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려야 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내 혼신을 다한 지적에 비둘기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생활비가 꾸준히 나오는 이상, 자네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뭐….”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변명할 말은 잔뜩 떠올랐지만, 그것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에.
“자네는 문제라는 걸 알고 있지만 힘들고 귀찮으니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당장 부모님이 죽을 일도 없으니 긴장감이 없겠지. 그것은 마치 끝없는 바다를 생각 없이 날개 한번 움직이지 않고 활공으로 건너려는 새와도 같아. 날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엔 날개는 이미 습기를 잔뜩 먹어 쓸모없게 되어있기 마련이라네.”
날개를 펼치듯 팔을 벌리며, 그리고 너무나도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비둘기녀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나. 나 카이저 피닉스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비둘기의 화신. 자네의 그 고민에 대해 멋지게 상담해주도록 하겠네! 좋아. 그럼 상담실로 가지!”
진짜 ‘상담’이 시작된 순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광활한 새하얀 공간에서 수백 마리의 비둘기, 아니 닭둘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에 뒤룩뒤룩 살찐 돼지 같은 비둘기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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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닭둘기들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
텅 빈 새빨간 눈을 하고 울어대는 수백 마리의 닭둘기들은 어딘가 공원에서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혐오감이 있어서 결국 나는 몇 분 견디지 못하고 위장 속의 내용물을 바닥에 철퍽철퍽 게워냈다. 구구구구구구구. 그 토사물에도 수십 마리의 닭둘기들이 모여들어 기계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쪼아댄다. 또 토해버릴 것 같다.
“괘, 괜찮은가?! 환경을 구축하다 보니 늦어버렸네만 역시 이건 싫었겠구먼. 죄송하네!”
내가 또 우웩 하고 게우려 하기 직전, 닭둘기 10마리 정도 떨어진 곳에 비둘기녀가 나타나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나는 겨우 진정해서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으으 하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다시 한 번 정말 미안하네. 으음, 여기는 설명하자면 자네의 무의식에 개입해서 내가 임시로 만들어낸 상담실이라네. 이름은 ‘닭둘기 원더랜드’지. 이곳에 가득한 닭둘기 근성들을 전부 실체화시켰더니 이렇게 많아져 버렸지 뭔가. 물론 실체화라고 해도 여기 ‘닭둘기 원더랜드’에 한해서의 이야기니까 걱정할 건 없다네.”
여기의 구구거리는 닭둘기들이 전부 내 썩어빠진 근성…. 스스로도 안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틀려먹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울 것 같았다. 닭둘기들은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낮은 소리고 구구 울어댔다.
“방해가 되니 일단 저 쪽으로 치워놓고 상담을 시작하도록 하겠네. 휘익!”
비둘기녀가 휘파람을 불자 갑자기 바닥에서 울타리가 솟아나 뱀처럼 꿈틀거리며 닭둘기 무리를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땅에서 쑤욱 하고 탁자와 의자가 솟아나온다. 탁자 위에는 사브레와 홍차까지 놓여있었다.
“자, 그럼 상담을 시작하겠네. 부담 가지지 말게나.”
비둘기녀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며 말했고 나는 그제야 비둘기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14살의 귀여운 모습이던 비둘기녀는 어느새 굉장한 나이스 바디의 어른이 되어있었다. 왕가슴 모델 체형이라고 해야 하나, 늘씬한 몸매에 커다란 가슴에 탄력 있어 보이는 허벅지. 거기에 내 교복 셔츠는 몸이 커지니 진짜 아슬아슬한 길이라서 보일락 말락 하고 가슴 부분은 터질 듯이 빵빵했다. 눈매 또한 어른스러워진 것이 성인의 매력이 물씬 느껴져서 몸에 열이 후끈 올라온다. 이, 이거라면 흥분해도 부끄럽지 않아!
“뭐, 뭔가?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고. 참고로 이 모습은 여기 한정으로 한번 힘 좀 써본 것이야.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기쁘긴 하다만 일단 상담을 하지 않겠는가?”
“아, 앗, 아, 알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마는 나였다. 방금 전까지 반말 썼으면서.
“편하게 있게나. 어차피 여기는 자네의 머릿속이지만 말이야. 잠시 내가 상담실로 빌리고 있을 뿐. 아, 혹시 멋대로 점거해서 기분 나쁘다든지 그렇다면 사과하지.”
“아니, 별로, 괜찮아요.”
“어색하게 왜 그러나? 좀 전처럼 편하게 반말하시게나. 나까지 부담스럽지 않은가.”
비둘기녀의 말에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비둘기녀는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며 사브레를 오독오독 먹었다. 비둘기 주제에 홍차냐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이래선 얼마 안 있어 카이저 피닉스라는 이름도 납득해버릴 것만 같다.
“흠, 그나저나 이곳에 대한 자네의 감상은 어떤가? 결코 좋진 않을 것 같다만.”
“…혐오스럽네. 방금 전에 토해버리기까지 했고.”
내가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비둘기녀는 역시나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동안에도 울타리의 비둘기들은 쉬지 않고 구구구 울어대서 상당히 정신 사나웠다.
“좋아.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하지. 뭐, 솔직히 말하면 상담보단 유도심문이나 정신고문에 가까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만…. 힘들더라도 조금 참아주시면 좋겠네.”
유도심문, 정신고문…. 뭔가 돌이킬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놓고서 안 하겠다는 건 심히 남자답지 못하다.
“알았어. 시작해도 괜찮아. 나름대로 참을성은 있으니까.”
내 대답에 비둘기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심문, 아니 상담을 시작했다.
“저 닭둘기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살찐 것이라고 생각하나? 자네 속의 닭둘기 말이네.”
“으음…. 아마 부모님이 주는 생활비가 아닐까. 그거 말고는 잘 모르겠는데.”
내 자신 없는 대답에 비둘기녀는 고개를 젓고 반론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정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네. 부모님이 주시는 생활비는 ‘딱 생활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닌가? 저렇게 뒤룩뒤룩해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저 닭둘기들을 살찌운 것은 그것 이외의 무언가가 있다네.”
탁. 비둘기녀가 찻잔을 탁자 위로 돌려놓았다. 거기엔 좀 전의 14살 때의 모습과는 다른 위엄이 있어서 나는 조금 위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모르겠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라도 괜찮다네. 나는 자네를 비웃지 않아. 부끄러워하지 말게나.”
비둘기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뭐든지 꿰뚫어보는 듯한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결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말했다.


“아마, 그건…. 두려움이 아닐까.”


“그래, 정답이네. 이들을 살찌운 것은 자네의 두려움이야. 날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지. 현실로 치환하면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정도가 되겠지? 그 이외에도 이것저것 있을 것이야. 더 강한 자들에게 공격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어디를 가야 할지 알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 먹이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 거기에 부모님이 주는 생활비라는 도피처로 인해 이렇게 살이 잔뜩 불어버린 것이지.”
그리고 잠시 정적. 비둘기녀는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앉아있는 나를 응시하다가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여기에 한번 닭둘기의 현실을 대입해보겠네. 조금 잔혹할 테지만 참아주시게나.”
비둘기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닭둘기를 둘러싼 울타리가 사라지고 주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칙칙하고 조악한 색깔을 한 장난감 같은 도시였다. 닭둘기들은 도시 한가운데의 방금 전 울타리보다도 훨씬 좁은 공원에 와글와글 모여 있었고 그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이 질려버린 닭둘기 한 마리가 앞의 도로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커다란 트럭이 그를 덮쳤다. 구웃! 하는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지나간 곳에는 회색 깃털만이 남겨져 있었다. 순간 뒷목이 싸해졌다.
닭둘기들은 방금 사건에 동요하며 시끄럽게 구구 울어댔다. 그리고 어째선지 또 다른 닭둘기 한 마리가 도망치기 위해 공원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차에는 치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에게 낚아채어 골목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공원에서 도망치려던 닭둘기들은 하나하나 갖가지 방법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이윽고 아무도 공원에서 나가려 하지 않게 되었다. 비둘기들은 공원에서 나가지 않고 구구거리며 음식만을 파먹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등에 달리 확성기에서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우리 ‘닭둘기 시티’는 닭둘기를 해조로 결정, 앞으로 먹이를 팔거나 주는 사람은 벌금형에 처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구제를 시작…”
방송의 뒷부분은 비둘기들의 울음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도시 곳곳에서 새까만 사람들이 총과 커다란 자루를 들고 뛰쳐나왔다.
“뭐야. 이게….”
총에 맞는 순간 닭둘기들은 만화처럼 펑 하고 깃털만 남긴 채 사라졌다. 가까스로 총을 피해 도망친 닭둘기들은 손에 잡혀 산 채로 자루에 쑤셔 넣어졌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한 광경이지만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어떠한가? 이게 현재 닭둘기들의 모습이라네. 실제로 저들은 이제 유해동물로 지정되어 잡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네. 심지어 먹이를 주면 경범죄. 날지 않아서 날지 못하게 된 새들의 말로야. 자연에게도 인간에게도 버림받고 마는 것이지.”
비둘기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도시가 사라지고 비둘기들은 전부 다시 생겨난 울타리 안으로 돌아갔다. 흠, 흠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기 흉하니 원래대로 돌려놓지. 조금 심한 걸 보여줘 버렸어…. 보고 있자니 나도 조금 우울해졌다네. 그렇다면, 여기에 자네를 대입하면 어떤가?”
대입하고 뭐고 간에 머릿속에 새하얘져서 어지러웠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심하게 반응하는 걸까. 모르겠다. 아니, 알겠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머리 아파.
“저, 저기? 괜찮나? 충격이 컸던 건가? 정신 차리게나. 그, 그건 환상일 뿐이라네! 실제론 저렇게 총 들고 잡거나 하진 않으니까 말이지! 성기능을 제거하거나 하는 정도야!”
내가 계속 굳어있자 당황한 비둘기녀가 울상이 되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자기가 보여줘 놓고선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성기능을 제거한다니 정말 그런 짓 하는 걸까. 완전 무셔.
“시, 실성했는가?! 으아, 이렇게 충격이 클 줄이야! 나, 나는 어떻게 해야!”
“아, 아냐. 아냐. 그냥 머리가 좀 아팠던 것뿐이야…. 조금 놀라서.”
“그랬나. 후우, 깜짝 놀랐다네. 확실히 좀 전의 그건 트라우마로 남을 법도 하네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비둘기녀는 괜한 것을 보여줬다며 안절부절못했고 나는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멍하니 새하얀 천장을 바라봤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대화 없이 5분가량 시간이 흘렀다. 비둘기녀는 아까 전부터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반복하며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어째선지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저, 정말 죄송하네! 잘못했으니 사죄의 의미로, 가, 가슴을 만져도 괜찮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으로라도 기분이 풀어진다면…!”
그 말과 함께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는 비둘기녀. 단추가 하나하나 풀릴 때마다 셔츠가 벌어져서 매혹적인 가슴골과 크고 좋은 형태를 가진 예쁜 가슴이
“그, 그만!! 그만, 아, 아아! 나는 대체 왜?! 아무튼 그만해!!”
드러났지만 참지 못하고 말리고 마는 한심한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 이 겁쟁이 쪼다 등신. 평생 이렇게 살다 총각으로 죽어라. 좀 뻔뻔하게 나가서 마구 만져도 됐을 텐데.
뭐, 아무튼 바보 같은 일로 긴장을 풀고 나니 그런대로 생각이 정리되었다. 나는 여전히 단추 두 개가 풀린 상태로 쭈뼛거리는 비둘기녀의 가슴골을 지긋이 쳐다본 뒤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어렸을 적부터 머리도 별로 안 좋았고 체력도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아이였어. 게다가 부모님은 항상 맞벌이로 바쁜데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친구도 얼마 없고. 그래서 집에서도 거의 혼자 지냈었어. 중학생이 되어선 집안 사정상 이렇게 생활비만 받으며 따로 자취하게 되었고…. 철저히 혼자 살아왔다고 해야 할까.”
내 말에 안절부절못하던 비둘기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혼자 살면서 상처도 입고 실패도 했어. 물론 패배도 수없이 겪었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체력도, 머리도 그다지 좋지 못하니까. 하지만 내겐 고민을 하소연할 친구도, 응석을 부릴 부모님도 없었어. 가지고 있는 거라곤 매달 평범하게 지낼 정도의 생활비 뿐. 뭐랄까, 정말 살아갈 수 있기만 한 정도로만 살았다고 해야 하나? 설명이 잘 안 되네. 아무튼 저 닭둘기들이랑 어딘가 비슷하게 살아왔어.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생활만 하는 내가 있더라. 힘내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특기라 할 만한 것도 없어. 그냥, 먹이만 먹을 뿐.”
구구구구구. 내 감정이 전해지기라도 하는지 닭둘기들이 구슬프게 울어댔다.
“하지만 언제까지 먹이가 나올 리가 없잖아. 부모님도… 언젠가는 죽어. 그리고 난 언젠가 좀 전의 닭둘기처럼 되겠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이대로 가면 그냥 끝이라는 걸.”
현실을 새삼 깨닫자 눈물이 조금 나왔다. 비둘기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나는, 이렇게 무능한데. 항상 실패만 하고, 잘 하는 일도 없는 내가 뭘 해야 하는 건데…!”
“간단하지 않은가. 날아서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네.”
내 울음 섞인 질문에 비둘기녀는 너무나도 쉽게 답했다.
“공원의 쓰레기를 먹는 것을 그만두고, 날아가서 스스로 먹이를 구하면 되는 거라네. 도시를 벗어나서 제대로 된 숲으로 가면 되는 게 아닌가?”
그게 쉽다면,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안 되니까, 이러고 있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계속 실패하기만 했는데! 저 녀석들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저렇게 살쪄서 뒤뚱거리기만 하는 애들이, 어떻게 날 수 있겠어!”
“아니, 잠깐. 내 생각에 그건 좀 틀리다고 생각”
“생각하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안 되잖아! 말로는, 말로는 다 되지! 하지만,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나는, 글러먹은 인간이니까! 뭘 해도 안 된다고!”
어느새 나는 흥분해있었다.
사실 이런 상담이라면 지겹도록 들어왔었다. 누구든지 열심히 하면 될 거라느니 그런 막연한 이야기만을 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안 되는걸. 나는, 열등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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