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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계(REM界)의 룰
글쓴이: BBing
작성일: 11-09-15 23:07 조회: 3,131 추천: 0 비추천: 0


Prologue-


*


『평행 세계라는 것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것들 중 일부는 비슷한 형태일 수도 있고, 다른 일부는 전혀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절대 만나지 않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평행'하다.

그러나- 딱 하나.

모든 세계와 만나는 세계가 존재한다.

말하자면- '수직'의 세계.

그것은 어떤 평행 세계와도 다른,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

모든 평행 세계의 정보를 가진 세계.


어느 평행 세계에서는 그것을-.




*



으, 챠.

아아, 꿈인가…랄까, 무슨 꿈이었던 거지? 낯익은 얼굴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평소에도 이런 식이라면 치매를 의심해 봐야할 상태의 머리. 꿈은 원래 잘 기억이 남지 않는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 공짜 정기검진까지는 앞으로 몇 년이나 남았더라.

“졸았습니까?”

소연 누님이 불쾌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자세를 만들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이 살짝 안쓰럽다.

“에…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변명을 하려드는 것은 학교생활로 인해 길러진 나쁜 버릇이다.

“어이, 고등학생 씨. 그래서 대학은 가겠어?”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던 현정이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도 고등학생이잖아-라고 생각은 하지만 졸았다는 것은 사실이라 할 말이 없다.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음… 글쎄….”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완전히 백지. 아직도 머릿속이 몽롱하다.

“그럼 중간부터 다시 설명하죠.”

소연 누님이 파아, 하고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다. 멍청해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세계의 이름은 렘계(rem界).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으음-

“뭘 고민하는 척을 하시는 겁니까. 아까와 완전히 똑같은 반응이 안쓰럽습니다.”

아하하, 학교에서 질문 받을 때의 버릇이 그만.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니까 설명을 듣고 있는 처지였지요.

“렘수면이라는 말은 아십니까?”

“그, 얕은 잠을 말하는 거지? 꿈은 그 상태에서 꾼다고 하고.”

오오,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분. 감탄의 역치가 낮다. 나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고 있었던 겁니까.

“정답. 렘계와의 접촉은 일반적으로 꿈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렘수면 상태일 때 접촉 가능한 세계니까 렘계인 것입니다.”

“너무 대충대충인 것 같은데.”

“저희 업계가 좀 그렇습니다만.”

인정하는 거냐.

“일반인에게 알려진 이야기로는 꿈은 뇌 작용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만, 실제로는 렘계의 정보를 읽는 활동입니다. 추체험이라는 말이 가장 알맞겠지만요.”

아, 음?

“추체험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것을 말하는 거야.”

타이밍 좋은 부가설명 감사합니다.

“어쨌든 꿈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렘계에 기록된 자신, 혹은 다른 세계의 자신의 경험 정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아아, 졸려. 이거, 수업 듣는 것 같아.

“다만!”

딱, 하는 소리가 들리고 뒤늦게 고통이 느껴진다. 소연 누님이 손에 삼각 플라스크를 들고 있었다. 저 모서리로 찍은 건가. 깨지면 어쩌려고?

“단순한 '읽기'가 아니라 '불러오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불러오기가 되면 이쪽 세계의 정보가 바뀌게 되고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크라임[위법]이나 룰 브레이커[제약의 파괴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응용범위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불러오기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연구 중입니다.”

틀렸다. 너무 졸리다.

“쿠울….”

쨍그랑!!

“끄아악?! 유리조각이, 유리조각이?!”

“플라스크는 원래 잘 깨지되 큰 조각으로 깨지도록 만들어지기 때문에 뒤처리는 쉬운 것입니다.”

“설명은 필요 없으니까 빨리 치워!!”

그렇다고 해도 머리 위에 유리조각이 얹어져 있는 난 전혀 괜찮지 않다고!!

“시끄러워.”






제 1장






『렘계(rem界)-라고 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은 신이 주재하는 모든 세계의 정보가 담긴 세계이며, 모든 세계와 이어진 세계.

우연에 의해, 누구나 렘계에 접촉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접촉을 통해, 이 세계에서 우리는 다른 세계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다른 세계의 정보라고는 해도, 영혼의 파장이 같은- 즉 다른 세계의 자신의 정보 외에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

그러나, 그런 정보라도 위력적일 수밖에 없다.

정보는 곧- 실재. 실재는 현상으로 현실에 간섭한다.

우연히 다른 세계의 자신의 정보를 얻은 존재는, 새로운 몸을 얻어 이 세계의 룰을 벗어난 능력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런 사람을- 룰 브레이커, 즉 제약의 파괴자라고 부른다.

그런 인간 외의 생물을- 크라임, 위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전혀 다른 뜻으로 이름을 붙여 구분을 짓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라고, 간결한 설명에 사설을 덧붙이도록 하자.


크라임을 제거하기 위해, 룰 브레이커는 움직인다. 그것뿐인 룰-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뒤편의 룰이 존재한다.』


*



도시에 살다 보니 느끼는 거지만,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골목길 중에는 그 끝이 막혀있거나 해서 곤란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곳도 그런 막다른 골목 중 하나로, 건설 허가의 무계획성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건물을 좌우로 둔, 폭은 4미터 정도에 끝에서 끝까지 20미터 가량 되는 쓸모없는 공간. 아스팔트 포장까지 완벽해서 길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 끝은 다시 고층 빌딩의 뒷부분을 마주하고 있어 통로의 역할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곳을 완전히 방치해 둔 것도 아니다. 버려진 쓰레기가 작은 산을 이루었고, 그 때문에 주변 도둑고양이들의 회합소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고양이는 단 한 마리. 물론 저것을 고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잡종 고양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몸통을 덮고 있다. 크기는 트럭보다 조금 작은 정도. 눈은 얼굴 한가운데에 딱 하나.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모습.

뭐, 그건 이쪽의 상식에 의거했을 때의 이야기. 저 녀석은 크라임- 즉 다른 세계의 생물이니까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는 저런 고양이가 정상일지도 모르지-라고 납득해 버린다.

그러나, 이곳에 있다.

크라임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인간에게 지극히 위험한 종류가 있는가 하면, 내버려 둬도 상관없을 것 같은 녀석들도 있지만- 이곳에 나타나 버린 크라임은 전부 배제되어야만 한다. 그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계의 잣대를 망가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 속한 절대 다수의 평온을 위하여.

“길우야, 저거- 일단은 고양이일까?”

현정이가 내게 물었다. 눈앞의 크라임이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인지, 현정이는 좀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공격적이지 않다-라는 말로는 부족할까. 저 녀석, 완전히 우릴 무시하고 있는데.

현정이는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다. 게다가 꽤나 동안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이 녀석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 게다가 옆에 있는 나라는 인간과 동급생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동안인 것이 다가 아니라, 평범하게 검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특이한 광채를 가진 머리카락이라든지,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도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흑수정같은 눈이라든지- 어느 곳을 보더라도 심박수가 올라갈 정도의 미소녀. 지금처럼 손에 을 든 상태가 아니라면 남녀 상관없이 집에 데려가버리고 싶다고 느낄 것이다.

“음- 원본은 그렇겠지.”

이런 곳에 돌아다니는 생물 중에 저것과 비슷하지만 고양이가 아닌 동물이 있다면, 그 녀석은 동물원에서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확률은 극히 희박.

“그런가아~”

현정이는 왠지 늘어지는 말투로 중얼거리고는 발치에 놓인 커다란 직육면체 모양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은 잘 정리 되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구성물이 좋게 말했을 때 생활용품인 것들- 즉 잡동사니다. 현정이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보온병과 컵, 그리고 양갱을 꺼내고는 검을 집어넣고 가방을 닫았다.

“어이, 잠깐.”

“왜에?”

뭐야, 그런 귀여운 반응 보이지 말라고! 쓸데없이 두근거린단 말이야!-랄까,

“어째서 검을 집어넣는 거냐?”

나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이런,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으음, 싸우지 않을 거니까?”

어째서 의문문인 거냐.

“넌 룰 브레이커지?”

나는 찻잔에 보온병에 담긴 녹차를 따르기 시작하는 현정이를 제지했다. 생긴 건 어린애면서 취향은 양갱에 녹차라는 것의 갭이- 음, 이건 사족이다. 통과.

“응, 그런 설정일걸?”

설정이라니, 위험한 발언 하지 마. 뒷수습이 귀찮아질 수도 있다고.

“룰 브레이커의 임무는 뭘까나?”

“크라임의 배제와 일반인과 크라임이 관련되는 사태의 방지 및 사후처리-라는 걸로.”

사전에서 복사+붙여넣기를 실행한 듯한 대답이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답이라는 것도 사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주고 싶다. 이 녀석이 좋아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자, 마지막 문제. 여기엔 크라임이 있다. 룰 브레이커인 네가 할 일은 무엇일까?”

“티타임을 즐깁니다?”

“틀려어어엇!!”

깔끔히 인정하건대, 냉정을 가장할 수 있던 건 여기까지였다. 근거 있는 불안감이 목 바로 뒤까지 스멀스멀 기어오는 상황이었으므로, 나의 이 시답잖은 발광을 이해해 주시길.

“네가 해야 할 일은 저 크라임을 처리하는 거잖아!!”

고의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오답이다.

“그런 건 길우가 해야 할 일이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데?

의문과 불만을 반반으로 섞은 시선을 열심히 보내보았지만 반응은 무시 일색. 어이, 아가씨? 듣고 계십니까?

쪼르륵-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찻잔에 녹차가 담겨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휙, 하고 눈앞을 뭔가가 스친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 거냐?!”

현정이가 차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방심을 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현정이가 보온병을 던져 올리고 '접촉'을 시도해 올 때 몸을 뒤로 젖혀 피할 수 있었다. 현정이가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있어서 움직임이 제한되었다는 것도 내게는 좋았다. 현정이가 찻잔을 집어던질 정도로 상식이 없었으면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정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미안하지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단다.

“차가 쏟아지면 아까우니까 던지거나 하지 않는다고.”

텅, 소리와 함께 보온병이 현정이의 손 안에 떨어진다. 재주도 좋네 그려. 독백을 읽는 재주는 칭찬할 기분이 들지 않지만.

“차 따윈 아무래도 좋아. 왜 네가 저 녀석을 처리하지 않으려는 건지가 더 문제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일신상의 안위.

“나는 고양이 애호가니까 고양이는 죽이지 않을 거야, 라는- 이유?”

현정이는 이제 아예 가방위에 앉아버렸다. 진짜로 녹차를 즐길 생각인 것 같다. ㅅ자 모양으로 입을 다문 것에서 결의 비슷한 게 느껴진다.

고양이 애호가라. 분명 그런 사람들도 꽤 있었지. 이 녀석도 평범-하진 않지만 여고생이라는 부류고, 귀여운 것에 약하다는 것도 일리는…… 아니, 뭔가 있어. 이 녀석, 표정이랑 말이 어딘가 어색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냄새가 풀풀 난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응! 이라고 묘하게 단호한 대답이 오히려 의심스럽다.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는 추측해 보는 수밖에. 정답을 얻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힌트는 고양이 뿐. 고양이라-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아, 요괴 고양이 저주-일까나.”

문득 떠오른 말을 입에 담자, 현정이가 알기 쉽게 몸을 떨었다. 이 녀석, 심리전은 무리겠다.

“그, 그런 헛소리 믿지 않겠습니까?!”

“너, 어미가 이상해져버렸다만.”

요괴 고양이 저주-라고 하면 꽤 보편적인 괴담 중 하나로, 살해당한 고양이가 귀신이 되어 자신을 죽인 사람을 괴롭힌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바로 어제, 이 녀석이랑 같이 TV에서 그런 방송을 봤었지. 설마하니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바로 옆에 한 사람이 존재할 줄은.

“난 고등학생이니까 그런 괴담 따위는 믿지 않아!!”

얼굴을 확 붉히며 필사적인 부정.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다. 네가 이러는 건 인정하는 것 밖에 안 된다고.

뭐, 귀여우니까 됐어.

“아하하, 그래- 크라임이나 룰 브레이커도 존재하는 세상에 저주가 없으란 법은 없지.”

미래의 호감도를 위해 웃으며 동의해 두도록 하자.

“믿지 않는다고 말했어!”

아니, 반응한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니까.

“므으- 내 말 안 믿는 거야?”

귀엽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할 수는 없다. 나의 일신상의 이유로.

“아니- 믿을게. 응, 믿는다구.”

지금 내 입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손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아무리 그래도 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며칠이나 앓아눕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 나대신 저것 좀 처리해줘~”

크라임을 가리키는 현정이. 크라임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라면 피와 살이 난무했을 상황인데… 양쪽의 위기감은 메르헨 수준.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직행하면 참 좋을 텐데.

“…………… 그건 무리라니까.”

원래라면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무리였겠지만- 후훗, 놀랐는가. 많은 접촉을 통해 면역력을 상승시킨 결과다. 하지만 방금도 알았어, 라는 대답을 80번 정도 씹어 삼키고서야 부정의 답을 입 밖에 낼 수 있었다. 정말 무서운 녀석……. 이 정도 정신 공격을 이겨낸 나야말로 승리자.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이지요. 근데 어째서 이렇게 아깝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나.

“혹시 요괴 고양이 저주가 무서운 거야?”

거절했음에도 현정이는 도발로 응수. 내가 그런 얕은 도발에 넘어갈 듯싶으냐.

“저주가 무서워? 내가 너도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보통은 고등학생씩이나 되어가지고 그런 괴담을 믿지는 않는다고. 무섭다고 하면, 저 덩치의 녀석이 덤비는 게 무섭다. 저런 거에 치이면 웬만한 교통사고는 애들 장난이라구.

“그럼 빨리 해치워버리면 되는 거야~!”

거절하기 힘드니까 그렇게 웃지 말아주시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역시. 억지로 거절하려고 하니까 목소리가 뒤집힌다. 불리해~ 상황이 너무 불리한 걸~.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기 싫은 거야?”

내가 거절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으면서. 요괴 고양이 저주 같은 거나 믿는 주제에 이런 부분에서 영악하게 굴고.

“이런 일- 나 별로 좋아하지, 않고.”

“헤에-.”

“아니, 역시 뭐랄까, 후유증 있는 거, 알잖아?”

하하, 하고 마른 웃음으로 넘어가 보자.

“(빤-히)”

……넘어가 줄 리가 없나.

“(빤-히)”

으윽…….

“(싱긋)”

뚝, 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생각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길 수 없다. 이 녀석한테는 이길 수 없어. 하기야, 진심으로 여자애한테 이기는 남자 따위, 되고 싶지 않다. 꼴사나워. 져주는 게 이기는 거다. 응. 절대로 내가 약한 게 아니야. 져 주는 거지.

“그럼, 잘 부탁해~ 슬슬 차가 식어버릴 것 같았다구~”

이 녀석은 듣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좋은 마이페이스로군. 이기심 가득한 속마음을 들어도 별로 상처를 받지 않는 내가 상대니 별로 상관은 없다.

“자.”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손을 꺼내 현정이 앞에 내민다.

현정이는 거리낌 없이 내 손을 잡는다.


노이즈.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 실제로는 내가 뒤집히는 거지만. 멀미가 난다.

“후우……”

순식간에 감각이 맑아진다. 평소와 다름없이 두터운 로브로 감싸인 몸. 걸친 옷에서 느껴지는 중량감에 이유 없이 안도감이 든다. 앞으로 이틀간 끙끙거리며 지낼 것은 조금 걱정스럽지만.

“에잇☆”

……어이어이, 잠깐!? 던졌어?! 나 멍 때리는 사이에 던져졌?! 빨리 해결하라는 독촉입니까?! 멀미를 진정시킬 여유는 좀 달라고!!

“핫, 상관은 없지.”

이걸 핑계로 이따가 머리를 실컷 쓰다듬어주든가 하자. 스킨십은 이 상태일 때만의 특권이기도 하니, 마음껏 즐기는 거다.

허튼 생각을 하며 공중에서 몸을 뒤집는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던 벽에 닿는 순간, 다리며 몸을 최대한 굽혀 충격을 줄인다. 그야말로 완벽한 착지(着地)- 아니 착벽(着壁)인가. 현정이의 정확한 투척으로 나의 위치는 크라임의 바로 머리 위. 높이는 4미터 가량. 크라임이 나를 올려다본다.

크라임은, 그 존재만으로 이미 위협.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계속 해온 현정이와는 달리, 나는 크라임을 제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희미한 죄의식이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 든다.

착벽의 충격이 가시고, 다리가 벽에서 분리. 중력에 영향을 받은 낙하. 나의 발밑에는 크라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저 올려다볼 뿐인 크라임의 이마에 드롭킥 비슷한 느낌으로 떨어진다. 경쾌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터엉-하고 탁한 소음이 발생했을 뿐.

크라임의 덩치로 인해 실제 떨어진 높이는 1.5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겠지만, 성인 남자의 무게라는 것으로 인해, 크라임일지라도 약간은 데미지를 받은 것 같았다. 크라임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기운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크라임이 머리 위에 올라선 나를 떨어내기 위해 고개를 쳐든다.

그 반동을 받아 공중으로 도약. 뒤로 8미터 가량을 부유한 뒤 착지. 카드득, 하고 신발이 시멘트를 긁어낸다. 미끄러진다고 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는 느낌이다.

착지하면서 낮췄던 자세를 바로하고, 소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크라임은 이제 나를 완전히 적으로 간주한 듯, 내 쪽을 향해 자세를 낮추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살짝 시선을 돌리니 태평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현정이의 모습이 보인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구만. 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좋아, 고양아. 와라.”

나는 로브 안쪽에서 손에 닿는 대로 단검을 꺼낸다. 동시에 크라임은 내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 크라임치고는 안쓰러울 정도로 느린 속도에, 이 녀석이 아직 성체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다시금 고개를 들려 하는 죄의식을, 나는 인간이다-라는 이기주의적 생각으로 몰아낸다. 나는 인간. 이 녀석은 크라임.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뇐다.

“위에서부터 심판하라, 제물은 나의 피. 염(炎)의 일승(一乘)- 도깨비 불.”

오른손에 쥔 단검이 왼손 둘째손가락을 스친다. 저릿한 통각은 무시. 방울져 떨어지는 핏물을 전방을 향해 흩뿌린다.

흩어지는 핏방울이 각각 발화. 주먹 크기 정도의 화구(火球)가 되어 크라임을 덮친다. 직격한다고 해도 가죽에 의해 큰 데미지는 없을 테지만, 불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으로 뒤로 물러서는 크라임..

거리는 벌어졌다. 싸움에서 거리란 곧 시간.

내게 필요한 시간은 충분하다.

“위에서부터 심판하라, 위에서부터 심판하라, 위에서부터 심판하라, 제물은 나의 피. 염의 삼승(三乘)- 적월(赤月).”

단검이 헤집는 것은 나의 손바닥. 칼날의 일부가 손에 먹히는 듯한 모양이 된다. 팔꿈치까지 저릿한 통각이 달린다.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양의 피가 흘러내린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흩어져, 초승달 모양의 불꽃으로 재구성된다. 하늘에 떠있는 적색의 달.

단검을 든 손을 들었다 내리친다. 동시에, 초승달은 거세게 타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칼날이 된다. 크라임은 그것을 피하려하지만, 사방이 막힌 골목 안에서 피할 수 있는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아악,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크라임의 몸이 갈라진다. 머리는 빗겨나갔지만, 오른쪽 몸은 완전히 베어져버렸다. 베어진 것 뿐 아니라, 상처 부위는 열기에 침식당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악취를 내뿜고 있다.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가 끝났다.

“역시- 이런 일은 찝찝하다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런 건- 단순한 도살과 차이가 없다. 나의,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목숨을 가볍게 앗는 다는 점에서.

“역시 양갱은 맛있어~”

현정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모처럼 분위기 잡고 있는데 그렇게 분위기를 깨야겠어?!”

완전히 티타임 모드. 진지한 쪽이 지는 듯한 공기가 깔려있다.

“에? 무슨 말이야?”

“…….아냐, 됐어.”

열 내 봐야 나만 손해다. 현정이는 원래 이런 녀석이니까.

“양갱 먹을래?”

내 표정이 안 좋다는 것을 느꼈는지, 현정이가 양갱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 양갱과 관련되기만 하면 이렇게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을 한다. 이런, 그런 표정으로 내밀면 받을 수가 없다니까.

“괜찮으니까 너나 먹어.”

“응, 그럼 사양 않고.”

오물거리며 양갱을 먹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끌어안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지금은 스킨십이 허용된 상태라고 해도 과도한 스킨십은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오늘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정도로 참는 거다.

슥삭슥삭.




*




30분 정도 누워있었던 것 같다. 전혀 회복되지 않는 몸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이제 네 번째입니다? 슬슬 익숙해 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으으윽, 말하는 것도 힘드니까 좀 내버려둬…….”

시내와 주택가 사이의 경계쯤에 위치한 원룸. 크기는 내 방의 세 배쯤. '기관'의 말단 사무소다. 주요 업무는 크라임의 발생 확인 및 룰 브레이커에 대한 지원. 그리고 총괄 대표의 취향에 따른 연구를 조금. 지금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이곳의 총괄 대표인 소연 누님이시다. 총괄 대표-라는 건 이름뿐으로 직원은 누님 한 명 밖에 없다.

자칭 천재 과학자지만 외견은 아무리 봐도 하얀 가운을 걸쳤을 뿐인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이런 걸 보고 합법 로리라고 부르던가. 아무래도 좋다. 이렇게까지 어린 건 수비범위 밖이다. 스물은 넘었다고 하는데 존댓말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소연 누님이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존댓말을 쓰는 상황.

“냐하하하, 남자라면 멀쩡하게 탁탁 털고 일어나는 겁니다!”

이 정도의 데미지를 순식간에 털고 일어나려면 어떤 도시의 개구리 의사 분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후유증이 심한 걸 알면서도 크라임을 상대로 나를 내보내는 현정이는 무서운 아이. 장래가 심히 걱정된다. 뭐, 죽지는 않으니까 문제없다는 식인가.

현정이도 미안해하기는 하는 것 같지만.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얌전히 있던 현정이는 정말 귀여웠지~랄까나. 이렇게 험한 취급을 당하고도 마음대로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나는 변태일지도? 아니, 내가 나를 변태라고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막장이다. 나는 변태가 아니라 신사다.

“당신이 널브러져 있으면 제 심부름을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 없으면 안 됩니다.”

내가 여기 들락날락한 게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의지하시는 겁니까.

“심부름이라고 해도 중요한 일은 안 하잖아.”

“부려먹는 것은 심리적인 만족감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너, 그건 나를 똥개훈련 시키는 게 즐겁다고 하는 거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말을 했더니 아프다. 힘들다. 삭신이 다 쑤신다.

지금 생활은 약간 힘들고 귀찮지만- 재미있다.

말이 이상하다고?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라임과 싸운다든가 후유증에 낑낑대는 비일상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었다. 지금과는 다른 일상. 그립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평화로운 날도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일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전후 사정이 많이 붙는다. 으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선은 하굣길에 우연히, 우연히 이쪽 세계에 접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 꽤 복잡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과거 회상 편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여차저차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나도 모르던 나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고, 그 때문에 이 사무소에서 잔심부름과 예비 전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르바이트 수준의 급료도 받는다.

누가 듣더라도 이해가 잘 안 갈 내용이로군. 과거 회상 편… 필요성이 크다. 그러나 다음 기회에.

어쨌든 미리 밝혀둬야 할 것은 밝혀두자. 나에 대한 비밀이라는 것은-

“아핫☆ 다녀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몸을 억지로 뒤집어 소파에서 굴러 떨어진다. 곧 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현정이가 소파 위를 뒹굴고 있었다. 돌아온 거냐. 무섭다고. 달려들지 마. 단편적인 생각만 머릿속을 스친다.

“어서 오세요, 입니다. 그리고 소파에 앉을 때는 살살, 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습니다만.”

“네- 죄송합니다~”

단순한 자매의 인사로 보이는 훈훈한 대화다. 앉은 게 아니라 드러누웠다는 사실 같은 건 사소한 문제다.

그렇다면 큰 문제는 무엇인가? 당연히 내 안위다.

현정이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어이쿠, 위험.

“피하는 거야? 길우는 겁쟁이네~”

현정이가 팔을 뻗는 것을 피해 몸을 굴린다. 일어설 여력 따윈 없다. 아니 억지로, 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구르는 것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야하는 상황으로 추측할 수 있겠지. 이해해주길 바란다.

“크-윽.”

이 녀석의 행동은 고의다.

목적은 나를 도망치게 하는 것.

소파를 향해 뛰어든다거나, 팔을 뻗는다거나 하는 것들 전부. 실제로 닿고자 하면 내가 피할 방법 따윈 없다. 현정이는 룰 브레이커라서 평범한 인간의 반응속도는 가뿐히 무시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일부러 닿지는 않도록 한다.

단순히 말해서 괴롭힘이다.

물론, 현정이와의 스킨십이 싫을 리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끌어안고 싶을 정도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볼을 가볍게 꼬집어주고 싶다. 어차피 몽땅 거절당하겠지만.

자, 여기서 문제. 이런 내가, 어째서 현정이와의 접촉을 피하려하는가?

그것은 나조차 몰랐던 비밀.

어디의 치킨 자식처럼 이성과 접촉하면 코피를 흘리며 실신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현정이와 접촉하면 나는 다른 세계의 정보에 덮어씌워진다. 왜 하필 현정이와의 접촉에만 그런 반응이 생기는지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미스터리다.

정보가 덮어씌워진다는 것은 룰 브레이커가 되는 과정과 똑같다. 특정 계기를 통해, 다른 세계의 정보를 획득하는 현상-이라는 것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다만, 보통의 룰 브레이커와 달리 나의 '덮어쓰기'는 지극히 일시적. 길어야 한 시간 정도. 한번 룰 브레이커가 되면 이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뒤에 후유증은, 보시는 바와 같이. 이틀 정도의 극심한 고통. 평생의 수명 중 한 달 정도가 줄어든다-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후유증은 원래의 정보로 돌아갈 때 육체의 정보가 세계나 영혼과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지기 때문에 생긴다는, 대강의 설명을 받을 수 있었다. 덮어쓰기에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 다시 불러오는 나의 정보는 덮어쓰기를 하기 직전의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가버린 시간과 이동한 공간에 의한 오류가 발생, 그로 인해 육체에 부담이 가해진다는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진위 여부는 역시 불확실.

뭐, 내 몸의 장점이라고 하면, 덮어쓰기가 해제될 때 신체적 데미지가 리셋 된다는 점 정도인데, 어차피 후유증이 빈사 상태가 될 정도니 아무 소용이 없다.

“괜찮은 겁니까? 진통제를 드릴까요?”

소연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식해 보이는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1리터는 들어가게 생긴 녀석이라 겁먹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진통제를 쓰려는 겁니까? 살짝만 건드려도 혈관 파열은 기본일 것 같은데.

“아핫핫. 저는 괜찮습니다.”

빙긋, 웃음으로 단호히 거절. 모르모트로 마치기엔 아까운 인생.

“아하핫, 겁먹었습니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주사 따위에 겁먹었어요, 입니다.”

내가 그렇게 우스운 거냐. 그럼 네가 그 주사 맞아볼래?

“현정, 샘플은 가져오셨습니까?”

주사기를 가운 소매 안쪽에 집어넣으며(어째서?! 아니, 그보다 어떻게?!) 소연 누님이 물었다.

“아, 가방 안에 있어. 검이랑 같이 넣어두었으니까.”

현정이가 뒹굴, 몸을 뒤집으며 말한다. 그 몸짓이 고양이 같아서 귀엽다. 방금까지 괴롭힘 당한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나 참, 제대로 정리해 두라고 했지 않습니까.”

소연 누님은 투덜거리며 현정이가 던져둔 것이 분명한 직육면체 형태의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기겁을 할 물건이었지만, 이곳의 여자들은 태연하기 짝이 없다.

지퍼 백 스타일의 커다랗고 투명한 비닐 봉투 안에 1미터 길이의 검과 고깃덩어리들이 들어있다-라고 간단히 설명해 두자. 고깃덩어리들은 샘플- 즉 크라임을 연구하는데 쓰이는 소재다. 다시 말하지만 누님의 취향으로, 샘플을 수집하는 게 룰 브레이커의 의무는 아니다.

“하루에 샘플이 두 개나. 냐하핫, 오늘은 수확이 좋은 것입니다.”

소연 누님은 비닐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시약과 비커 따위가 난잡하게 늘어져 있다. 아까 내가 가져온 고양이의 눈 샘플이 둥둥 떠 있는 플라스크도 섞여 있어, 살짝 괴기스러운 느낌이 든다.

“집게 좀 가져오십시오. 아마 왼쪽 두 번째 서랍에 있을 것입니다.”

안경까지 쓰면서 연구자 모드에 돌입한 소연 누님이 평소대로 주문해 왔다.

“저, 저기요? 저는 지금 후유증 때문에 숨쉬기 운동이 버거운 상태인데요? 심부름은 거절한다고 아까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뭔 상관입니까.”

움직이기가 몹시 힘들다는 말입니다만. 긴 말을 한 마디로 잘라주셔서 감사하네요.

“아, 움직이는 김에 리모컨 좀 찾아 줘.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너도 아픈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찾으라고!

“집게는 아직 멀었습니까?”

“시끄럿!”

“으엥, 길우가 괴롭힙니다.”

괴롭히는 건 당신이야! 뭐야, 그 어색한 우는 연기는?

“우와, 길우는 심술쟁이다~”

대체 내 행동의 어디가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건데!?

“슬라임보다 쓸모없습니다.”

“평가가 심하다고!”

어째서 형체도 불안정한 녀석보다 못한 취급을!?

“하지만 슬라임이 너 보다 더 강한 걸.”

“진짜!?”

내가 알고 있는 슬라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데!?

“뭐, 덮어쓰기를 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덮어쓰기를 해도 가능성 수준이냐. 슬라임, 생각보다 강하다. 아니 무지 강해!

“…아아, 잠깐. 그런 방법이 있었네. 덮어쓰기.”

“…앗, 그렇군요. 너무 간단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 인간들 좋지 않은 걸 떠올린 얼굴이야….

“다른 세계의 길우라면 간단한 일이지?”

네?

“우후후후, 그렇습니다. 다른 세계의 길우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무서우니까 그렇게 웃지 마! 대체 무슨!?

““덮어쓰기를 하면 집게 가져오기(리모컨 찾기)는 낙승이네(이로군요).””

어째서 이럴 때 두 분 대사가 겹치는 겁니까?!

“자, 그럼 덮어쓰기를 하는 겁니다.”

“후딱 해버리자~”

현정이가 소파에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기지개를 펴는 모습마저 사랑스럽-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온몸에 격통이 달리지만 무시. 나도 인간이라 죽는 건 싫다고! 여기에 데미지가 더 더해지면 정말로 죽을 지도 몰라!

“자, 잠깐! 지금 후유증 때문에 빈사상태인데?!”

“괜찮습니다. 산송장입니다. 좀비 샘플인 것입니다.”

“전혀 괜찮지 않앗!”

여기에는 적들뿐인가. 나의 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망? 이 몸 상태로 가능할 소리를 해라. 현정이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뒷걸음질. 하지만 고통이 항상 동반되기 때문에 KO직전의 권투선수 같은 걸음걸이가 되어버린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마음을 편하게 가져.”

손목은 왜 푸는 거야?!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말아 주세요!

턱. 벽에 등이 닿았다.

“우아아아앗!?!?”

자동적으로 머리를 가드하고 몸을 웅크리는 자세로 트랜스폼.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이거 엄청 꼴사나운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말입니다. 어차피 허세 부리긴 늦었다. 동정표를 노리는 쪽이 현명하지 않을까.

나란 놈도 한심한 게, 생각이 고작 이런 수준이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에 슬쩍 눈을 떴다. 바로 옆에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는 현정이의 모습이 보였다. 현정이는 서랍 안에서 집게를 꺼내서 가볍게 뒤로 던졌다. 소연 누님이 캐치. 현정이가 몸을 돌리는 것에 놀라 몸을 떨었지만 현정이는 바닥에 떨어져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전부터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길우는 너무 겁이 많습니다. 사회생활이 걱정입니다.”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소연 누님이 말했다.

“맞아. 의심증일까? 난 리모컨을 가지러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덮어쓰기를 강요할 만큼 못된 사람은 아니라고.”

연하의 여자애들에게(외견 한정이지만) 무시당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겁이 많다는 것에서. 내가 겁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 같은 당신네들이 문제라고 생각해. 실제로 오늘, 요괴 고양이 저주가 무섭다고 강제로 덮어쓰기 시킨 게 누구였더라? 지금 소파에 앉는 바로 당신이지?

“냐핫, 그래도 가지고 놀기엔 좋은 것입니다.”

은근슬쩍 내 인권이 무시된 느낌인데.

“하긴, 길우가 여기에 들락날락하게 된 이후 분위기가 좋아진 것도 있으니까.”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대화는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롭다. 마치 내 성적 얘기를 할 때의 부모님 같은…. 화기애애한 건 좋지만.

“딱히 욕설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 성적 얘기는 욕설이야?!”

그래도 중상위권인데!

“뭐, 힘 내.”

“그러니까 위로할 필요는 없다고!”

매일매일 이렇게 하찮은 취급이라니, 내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장난감입니다.”

“독백 읽지 말아주세요!”

삶이 힘들고 슬픕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슬픈 환경. 이곳에서 불행한 건 나뿐입니까?

나는 불행으로 인해 넉 다운. 그러나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다.

현정이는 TV시청에 열중하고 있고 소연 누님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바닥이 시원하니 기분 좋다.

이대로 그냥 잠들어버려도 나쁘지 않-

“-을 리가 있냐!!”

“그건 그렇고, 지금 몇 시야?”

“아차, 벌써 시간이. 올 때가 됐습니다.”

“기대 반 걱정 반~”

현정이와 소연 누님은 나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가 나 좀 신경 써 줘요!

“어떤 사람인지는 본부에서 연락이 없었습니다.”

“길우 편이 되지만 않으면 괜찮아.”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다.”

“아, 우리가 먼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되지 않아?”

“그렇습니다만, 저쪽에서 받아들인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배제된 상태로 이해불능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어이어이,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된 설명을 좀 해 줘봐.”

이번에는 무시당하지 않았다. 소연 누님과 현정이는 뭔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는 오늘 서프라이즈한 선물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물?

“슬슬 시간이니까 마중 나가야겠지. 준비 해.”

마중?

“선물에 마중이라니, 대체 무슨 선물인데 그래? 오늘이 무슨 날이었어?”

머리를 굴려도 나오지 않는 대답. 내 생일은 아닌데. 특별한 날이라고 한다면 학교에서 이미 알았을 터. 으으음. 두 사람의 대화를 집중해서 들었다면 정답을 알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역시 대화를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관 본부에서 의사가 오는 것입니다.”

엣? 의사라고? 어째서 의사가?

“정확히는 힐러[치료사]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지만.”

현정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네 후유증을 치료해줄 사람을 찾았다는 거야. 이제 곧 올 거니까 마중 나가자구.”

그 말은- 이제 후유증 걱정 없이 스킨십을 시도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우오오오!!

순간, 독백이 새나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이 떠올랐다.

기뻐하는 나를 보고 소연 누님과 현정이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사실로 지금은 내 독백이 새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 다행이다. 이번 건 정말로 사회적 매장을 당하더라도 뭐라 할 말이 없었을 거야.

“자, 받으세요. 진통제입니다.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대충 될 겁니다.”

소연 누님이 던져주신 것은 캡슐 형태의 진통제. 세심한 배려가 고맙다. 지금 상태로 나가는 건 조금 무리였으니.

“참고로 먹는 게 아닙니다.”

“에? 그럼?”

아아, 왠지 한쪽 끝이 뾰족한 게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당연히 집어넣는 거죠. 항문으로.”

“필요 없엇!!”





*




“이렇게 빨리 지원을 해 준 건, 네가 특별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대로변까지 나와서 곧 온다고 하는 의사를 기다리는 중이다. 합류하기로 한 지점에서 나와 현정이는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한 번 룰 브레이커의 능력을 얻은 사람이 능력을 잃었다가 되찾는 것을 반복하는 경우는 내가 아는 한 네가 처음이야.”

현정이는 양갱을 야금야금 먹으며 말했다. 현정이 발치에는 언제나 그렇듯 큰 가방이 자리하고 있다. 여행가방과는 달리 바퀴조차 달려있지 않아, 현정이 같은 소녀가 가지고 다니기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요즘 사람들은 주변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

“그렇다는 건, 그 의사라는 인간이 파견 되는 건 정보 수집이라는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수를 세며 대꾸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과연 그 의사라는 사람이 우리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의사가 우리를 못 찾을 경우, 소연 누님 쪽으로 전화가 갈 테니 문제야 없겠지만- 시간을 소모해 진통제(주사식이다!)의 효과가 떨어지면 돌아가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

현정이는 접촉과 동시에 덮어쓰기를 일으켜 버리니까 부축조차 해 줄 수 없다. 의사가 다른 루트로 사무소에 들어가 버린다면 다시 여기로 불러내야 할 것이다. 본부에서 파견되는 의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이런 귀찮은 상황을 반길 것 같지는 않다. 현정이와 지속적인 스킨십을 위해 의사와는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너, 왠지 불온한 생각을 하는 얼굴인데.”

내 쪽을 보며 현정이가 툭 내뱉은 말이 나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불온이라니! 미래에 대한 나의 고민을 불온이라고 매도해 버리다니!

“어쨌든, 그 의사라는 인간, 사진이고 뭐고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의사라고 하니 가운을 입고 등장하는 것도 생각해 본다. 뭐랄까, 그건 너무 튈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양복 차림일까. 그렇다고 하면 찾아낼 방법은 없다. 상가에서 약간 벗어난 회사 밀집 구역이라 버스가 멈출 때 마다 다섯 명 정도의 양복차림의 남자들이 내리고, 기본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는 인간 중에도 양복차림의 남자는 비율이 높다. 이런 환경이라면 외계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검은 양복의 사내 같은 것이 돌아다녀도 절대 눈치 못 채겠지.

“저쪽은 우리 사진을 가지고 있으니 문제없을 것 같아.”

난 사진을 찍힌 기억도 내가 사진을 제출한 기억도 없는데 어째서 내 사진이 아직 만나지도 못한 의사분의 손에 들어가 있을까. 뭐, 하고자 하면 방법은 많겠지만. 앞으로는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행동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자.

“아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따분하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걸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짜증나기 시작한다. 나를 위해서 와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도 기분이 늘어져 버린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너도 양갱 하나 먹을래?”

이 녀석은 사람이 상태가 안 좋으면 양갱으로 모두 해결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됐어. 나는 별로 양갱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는 단 게 먹고 싶으면 초콜릿을 먹고 마실 것을 고르라고 하면 커피를 고르는 세대의 사람이다. 양갱이나 차는 뭔가 어중간하다고 할까- 잘 즐기지 못하겠다.

“뭐엇!? 말도 안 돼!!”

어째서 화를 내는 건데?

“어떻게 양갱을 먹어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아니, 양갱은 충분히 먹어보았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님이 간간히 아침 대신이라며 들이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만. 열량 보충이라면 초콜릿도 똑같을 텐데, 어째서 양갱을 고집하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가족도 꽤 미묘한걸.

“자, 먹어 봐! 그리고 양갱의 참다운 맛을 느끼라고!”

현정이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어린애처럼 화를 내며 양갱을 들이밀었다. 자기가 먹고 있던 걸 내밀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말하자면 간접키스. 접촉에는 해당되지 않으면서도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는 행위. 이 은혜를 냉큼 받아먹을 것인지, 양심에 따라 간접 키스라고 지적할 것인지 머릿속은 국회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혼돈-이라고 표현하기 딱 좋을 상태.

“빨리 먹으라구!”

현정이의 재촉에 양심이 밀리기 시작한다. 욕망이 있다는 건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라고 머릿속 의장이 판결을 내린다. 주변의 시선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던 이성은 밧줄에 묶여 심층 의식으로 던져졌다. 망설일 것 없다! 결행!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을 벌리고 양갱을 깨물었다. 으음, 이렇게 먹으니까 의외로 맛있는 것 같기도? 잘 모르겠다.

현정이와 사이좋게 양갱을 오물오물. 이런 분위기라면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이라고 아무 걱정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음이 끼어들었다.


탕!!


주변의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이 멎는다. 파란불을 앞에 두고도 자동차가 멈춘다.

바로 나의 등 뒤- 흔히 볼 수 있는 은행 안에 흔히 볼 수 없는 은행 강도가 들이닥쳐 있었다.

“어이, 바보 멍청이들!! 돈을 내놔라!! 이 총 보이지? 죽고 싶지 않다면 얼른 움직여!!”

마스크에 가려져 탁한 목소리로, 은행 강도가 은행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은행에 고용된 경비원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방금 총성으로 경비원이 쓰러졌다-라는 것. 처음부터 사람을 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녀석인 모양이다. 위험하게 되었다. 저런 인간은 작은 자극에도 총을 쏘아버릴 것이다. 즉, 거리를 향해 발포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 여기도 안전하지 않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평화로운 일상에 녹아있던 은행에 닥친 것은 분명 사건. 재난- 뭣하면 재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연.

확률적으로는 언제나 존재하던 가능성이 현실에 떠오른 것 뿐.

“…….”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다. 총? 강도?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영화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눈앞에 있었다.

“경찰이 오길 기다리면면 늦어. 저 녀석은 전혀 망설임이 없어. 아마 시간을 재서, 경찰이 올 것 같다 싶으면 적은 돈이라도 챙겨서 도망치겠지. 총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이상, 일반인으로부터 방해가 들어올 가능성은 적고. 방해가 들어온다고 해도 쉽게 처리가 가능. 은행 강도가 도망을 시도한다면 경찰이 그것을 뒤쫓기는 힘들지.”

딱딱하게 굳은 나와 달리 현정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분석까지 하고 있었다. 룰 브레이커로 생활하면서 예상외의 상황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아, 왠지- 저 녀석은 내가 처리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현정이는 살짝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대충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정의감을 가지는 것도 어린애라는 증거다. 어린애 같은 현정이라서 예상이 가능한 범위.

“너, 실례되는 생각을.”

현정이가 눈을 흘긴다. 독심술?

“아하핫.”

마른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슬슬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

“어쨌든, 난 여기에 있다구. 그냥 넘어가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해치워버릴 수밖에.”

“쉽게 말하지 마. 상대는 총이 있다고.”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충고한다.

“흥, 맞지 않으면 그만이야.”

허풍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다른 세계에서 현정이는 검사(劍士). 룰 브레이커로서의 능력은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 그 움직임은 어떤 동물보다 빠르고 그 검은 무엇이든 베어낸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검을 꺼낼 수는 없잖아.”

퉁, 하고 가방을 살짝 두드린다. 검은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응, 이 정도 수의 사람들이 본다면, 없었던 일로 무리겠지.”

긍정하면서도, 현정이는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다치지 않게 조절하는 건 맨손이 더 편해.”

으음, 진심인가. 이렇게 나온다면 어차피 내 힘으로는 말릴 수도 없고.

“그럼 혹시 모르니까 덮어쓰기를-”

“괜찮아, 혼자서도.”

빙글. 현정이는 내가 내민 팔을 피해버렸다. 현정이가 뻗은 손을 내가 피하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를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가방 잘 지키고 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정이는 움직였다. 처음은 보통 사람과 비슷한 속도. 은행 창구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은행 강도는 아직 현정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탁탁탁, 하고 빠른 발소리가 울린다. 은행 강도는 그런 상황에 이르러서야 뒤를 돌아보고, 현정이를 발견한다.

발포. 현정이 발치에서 콘크리트 파편이 튄다. 현정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파고들어 총을 쥔 손을 노리고 발차기를 시도.

놀랍게도, 은행 강도는 발차기를 피했다.

현정이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연속된 공격을 가한다. 발차기의 회전력을 이용해서 다시 돌려차기. 허무하게 은행 강도의 팔에 막힌다. 정확히 은행 강도의 오른팔에 들어간 발차기는 총을 떨어뜨리게 하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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